▶ 뉴욕한인125년 (51) 한국산 가발 전성시대와 독점금지법 위반 피소사건
뉴욕에서 한인들이 점포를 지니고 규모있는 비지니스를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비지니스에 눈을 뜬 몇몇 한인들이 찾아낸 업종이 바로 가발. 장용호, 안인모등이 선두주자로 나선 가발업은 품목 자체가 가볍고 부패하지 않는데다 이익 마진이 타상품에 비해 크다는 호조건 때문에 한인사회에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무엇보다도 노동집약적인 이 품목이 값싼 한국의 노동력에 의지해 한국산으로 수입된다는 점에서 취급하기가 여로모로 편했다.
선두주자 장용호(사진)가 가발과 인연을 맺은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962년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 뉴욕 무역관 부관장으로 부임한 그는 당시 무역관이 미국시장 조사 차원에서 특히 일본 대만등의 수출품들을 눈여겨 보았다고 말했다. 그중에 한국도 만들수 있다고 생각되는 상품 견본을 구입해 본국에 보내는 일이 주임무였다. 재임기간 원료 수출 부문에서 돈모와 인모가 사용되는 현장을 살펴본 결과 재미있는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돈모는 주로 브러시를 만드는 원료로 들어갔고 인모는 가발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는 것을 발견했던것. 인모 가발은 노동집약적인 수공업이어서 임금이 싼 한국에서 제조한다면 수지타산이 맞을 것으로 그는 판단했다.
브루클린의 어느 유태인 가발공장을 방문했을때 그들은 바늘을 사용하여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캡에다 뜨는 방식으로 가발을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인모가발은 시중에서 개당 200-300달러의 좋은 값으로 팔리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유태인 제조업자의 동의 아래 자신이 직접 제조기술을 익히게 되었다. 무역관 근무 2년차에 그는 본국 전출을 희망, 귀국한뒤 사표를 제출했다. 코트라 사직과 더불어 서울 답십리에 콩나물 키우던 40평 짜리 움집을 개조해 공원 30명으로 가발공장을 시작했다. 이때가 1965년 7월. 첫제품으로 나온 수제 가발 100개들이 한 박스가 뉴욕으로 수출되었다. 초창기 염색기술 부족으로 애를 먹은 적이 있었으나 비싼 수업료를 낸후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 YH(장용호의 이니셜)무역 상호로 첫해 대미 수출액 2만달러를 올렸다. 그보다 몇달 먼저 가발을 시작한 안인모(대니 안)와 함께 미국시장을
휩쓸었다. 다음해 수출액은 15만 달러.
이무렵 일본에서 개발된 카네카론 화학원사가 주재료로 사용되기 시작, 생산가가 뚝 떨어지면서 가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자집 귀부인들의 패션으로 인기를 끌던 가발이 직장여셩, 주부들에게 까지 일반화되어 한국산 가발은 미국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일종의 가발혁명이었다. 카네카론 원사는 한국의 서울통상, YH, 미방, 다나, 한독, 반도상사등 6개업체에만 독점 공급되는 바람에 이들 회사는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카네카론 공급을 받지 못한 업체들은 이태리제 원사를 들여다 가발을 만들었다. YH의 68년도 가발 수출액은 200만 달러, 69년엔 그의 배가 넘는 470만 달러, 70년에는 1천만 달러를 돌파하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그해 수출의날 행사에서 대통령으로 부터 산업훈장(철탑)을 받았다.
60년대말 부터 70년대초 뉴욕에는 56개 정도의 수입상(도매상)들이 전국을 상대로 비지니스를 하고 있었다. 처음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로 유학생 출신들이 하나둘 시작한 가발가게는 중소도시 도심을 파고들어 몫좋은 가게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발가게로 소문이 났다. 때마침 흑인 폭동으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심에 점포를 얻기가 쉬웠던 잇점도 있었다. 이무렵 흑인 여성 치고 가발 한두개 갖고있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는 바람에 미국시장에서 한국산 가발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았다. 미국내 어느 도시 어느 번화가를 찾아도 한국인 가발가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소매업계를 석권했다. 이시기에 한밑천 잡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 전성기도 잠시, 72년을 넘어서면서 침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 공장을 가진 모발수출조합 회원사가 34개사 였는데 이들이 적어도 하청공장을 여러개, 또는 수십개씩 거느리다 보니 1천개에 육박하는 하청공장들에서 과잉생산된 가발이 미국으로 넘쳐 흘러 들어왔다.
한국의 공급과잉이 미국시장에 이미 주체할수 없을만큼 포화상태를 만들어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과잉된 공급으로 인해 과당경쟁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곧 가격하락과 덤핑사태를 가져왔다. 이로인해 예상보다 빨리 가발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많은 업자들이 재빨리 타업종으로 전업하는 현상을 보였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불과 몇년간 반짝했던 한국산 가발 전성기를 놓고 수출량 조절만 잘 했더라면 한세기는 너끈히 재미를 볼수 있었던 좋은
아이템이었다고 아쉬워하는 업자들이 많았다.
뉴욕에서 제값받는 가발도매상으로 유명했던 킴스타의 70년대 판매 광고
1974년 독점금지법 위반 연방검찰에 피소
대미수출 관계자에 일대 경종
1960년대 후반부터 붐을 이루었던 가발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던 1974 년3월. 제미한인모발조합이 미연방검찰에 의해 독점금지법(Anti-Trust Law) 위반혐의로 제소당했던 사건은 당시 한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미국시장의 물을 흐려놓았던 일부 상인들은 물론 한국의 대미수출 관계자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려준 사건이었다. 이사건은 뉴욕을 중심으로 한 가발 도매상들의 단체인 재미한인모발조합이 한국 상공부 산하 모발수출조합과 담합해 미국내 비조합원 상사에게 가발 수입권을 주지 않았던데 기인한다. 실제로 이때 6개월간 한국으로 부터 수입을 하지 못해 손해본 도매상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외의 독점금지법 위반사항으로는 회원 상사들이 가발을 5달러 이하로 팔지 말자는 일종의 가격담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 조항이 소비자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제정된 독점금지법에 저촉되었던것. 일명 반독점법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법은 미국 역사상 1890년에 제정된 셔먼 액트로 시작된 것이다. 국내외 시장에서 독점이나 거래 제한등을 금지하기 위해 제정한 강력한 법으로 시장경제의 대헌장으로 꼽힌다. 국내외 거래를 제한할 능력을 갖춘 기업간에 이뤄지는 어떤 형태의 연합도 불법이고, 미국에서 이뤄지는 거래 또는 통상에 대한 어떤 독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두가지 핵심목표를 담고 있는 법이다. 당시 제소는 어느 가발 수입업자의 고발로 이루어진 것이나 과연 누가 고발자였는지는 아직까지 비밀에 쌓여있다.
제소를 당한 모발조합은 당시 뉴욕에서 활동하던 전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 변호사에게 이사건을 의뢰하고 본국의 관계기관에 협조를 요청했다. 1년6개월이 걸린 재판 결과 유죄로 판결났다. 벌금 2만5천달러에 재미한인모발조합의 3년간 단체활동 금지명령이 내려졌다. 벌금은 그후 하향 조정되어 5천달러로 내려간 상태에서 회원 상사들의 모금으로 해결됐으나 법원명령에 따라 단체는 와해됐다. 문제는 벌금 외에 엄청난 변호비용이었다. 16만달러 설도 있었고 그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는 설도 있으나 변호비는 본국의 관련 정부기관이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미한인모발조합이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피소됐을 당시 이사장 송영삼. 그는 다른 업종의 비지니스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조종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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