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웨이터.버스보이 ‘인기 서머잡’
이동원 전 외부장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식당 버스보이 경험
여름방학 동안 몬탁등 휴아지 식당서 일하면 1~2천달러 거든
고광림 전 주미공사 운좋게 제약회사서 편히 일해
해방 전 유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주로 백인 가정 하우스보이나 행상이었던데 비해 해방 후 유학생들의 주 아르바이트는 레스토랑과 관련된 일자리가 많았다. 웨이터나 버스보이 아니면 접시닦이가 가장 많았다. 그 외에 잔디깎기, 유리창 닦기, 집봐주기등 단순 노동 일자리들이 있었다. 유학초기 지방대학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위해 1951년 뉴욕으로 온 이동원(전 외무장관)은 첫 아르바이트를 컬럼비아대 티처스 칼리지 건물의 엘리베이터맨으로 시작했다. 학비는 면제받았으나 생할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학교 캐피티리어 접시닦이도 했고 호화스러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식당의 버스 보이도 했다. 경험이 없어 웨이터나 쿡은 염두도 못냈다.
고생끝에 귀국한 그가 박대통령의 비서실장 시절인 63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아들라이 스티븐슨 주유엔 미국대사의 초청을 받아 이수영 유엔대사와 함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고학시절 자신을 부리던 웨이터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수석웨이터가 되어 스티븐슨 대사의 메뉴를 받으며 이동원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반갑다는 표시를 하자 웨이터는 황송한듯 머리를 숙이고 나간 후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동원은 비서를 시켜 그에게 100달러 지폐 한 장을 팁으로 전해주라고 했
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자리를 뜰 때 그 웨이터가 다시 나타나 아래층까지 따라오며 머리를 굽신거리더라는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유학생 이동원은 1956년 박사학위를 받던 그해 6월30일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를 졸업한 이경숙과 맨하탄 파크애비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피로연은 가깝게 지내던 미시즈 김블(김블 백화점 오너)의 뉴저지 저택에서 베풀어졌다.
50년대와 60년대 한국 유학생들에게 인기있던 식당은 몬탁이나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플로리다 주립대를 다녔던 김옥(전 무역협회 뉴욕지사장)은 여름방학을 맞아 두해동안 뉴욕주 업스테이트 몬티셀로로 올라와 아르바이트를 했다. 교통편은 3-4명이 어울려 개스 등 비용을 분담했다. 리버티, 몬티셀로 등 휴양지 호텔 식당에서 버스보이나 접시닦이로 3개월간 일하고 나면 약 1천달러가 모였다. 식사와 잠자리가 함께 제공되었기 때문에 크게 절약이 되었다.
50년대 유학생인 김정희(전 뉴욕한인회장)는 유학초기 롱아일랜드 동쪽끝 몬탁의 호텔식당에서 버스보이로 경험을 쌓은후 업스테이트의 콩코드 식당에 웨이터로 들어가 학비를 벌었다. 8명-10명이 둘러앉는 한 테이블 분량의 식사를 한꺼번에 들고 가야되는 중노동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수입은 좋았으나 체력이 달렸다. 요즘도 그는 골프 치느라 콩코드 호텔을 들릴 때마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59년부터 여름방학 10주간을 주로 호텔식당 웨이터로 일하면 2천달러는 거뜬히 벌었다. 매년 여름방학을 그는 그렇게 보내면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60년대 유학생인 최병철(전 뉴욕중앙일보 사장)도 주로 식당에서 웨이터를 많이 했다. 당시 아르바이트 여건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식당 웨이터가 수입이 제일 높았다. 주로 브루클린에 있는 허비스 인터내셔널 식당에서 일했고 여름방학에는 캐츠킬마운틴 몬티셀로의 스티븐스 비어 호텔에서 웨이터 생활을 했는데 방학동안 2천불 정도를 벌면 생활에 별 문제가 없었다.
서부쪽으로 유학, UCLA를 다녔던 이정식(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인근 유명식당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옮겨다니며 고학을 했다. 웨이터는 힘에 부쳤고 주로 버스보이를 하느라 항상 여름방학은 바빴다. 그가 일했던 기억에 남는 식당은 베버리 힐튼호텔, 허들식당, 스티어스 등등. 3년간 고학생활중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그가 팔자에도 없는 단역 영화배우 노릇을 했던 것. 학교 외국학생 담당의 알선으로 MGM영화사 관계자를 만났을 때 성격배우로 뭉툭한 코가 인상적인 칼 말덴 감독의 ‘타임 리미트’란 영화에 나오는 북한 장면중 ‘출입금지, 금연’등 한국말 표어를 제작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영화는 한국전쟁중 포로가 된 미군 조종사들이 세균무기를 북한에 투하했다는 자백을 하기까지의 심리적인 압박, 갈등을 그린 내용이었다. 그런 연유로 리처드 베이스하트가 주연한 이 영화에 이정식은 북한 인민군 포로수비병으로 몇 장면 출연했다. 필자도 이 영화를 본적이 있지만 그의 총 출연시간은 몇 십초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5일간 배우 겸 컨설턴트로 700달러를 받아 중고차
를 샀던 기억이 있다. 당시 헐리우드 엑스트라의 일당이 21달러였는데 이정식의 일당은 80달러였으며 저녁 촬영의 오버타임 컨설턴트로 그와 같은 거액의 출연비가 손에 쥐어졌다.
힘든 유학생활 중에도 운좋게 큰 고생 안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유학생들도 있었다. 고광림(전 유엔대사)은 뉴저지 럿거스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때 뉴브런스윅 부근에 있는 E.R.스퀴브 제약회사에 들어가 약짓는 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일도 고되지 않고 시간당 임금도 괜찮은 편이어서 두해 여름방학을 거기서 보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가 단조로웠던 어느날 그에게 활기찬 사건이 찾아왔다. 학교내 유일한 한국인인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아데스 W. 버크스 교수가 펜실베이니아의 디킨슨 칼리지에 다녀오던 날 아주 명랑하고 예쁘고 발랄한 한국여성을 발견했다며 주소쪽지를 내놓았다. 그 학교 재학생인 전헤성이란 여학생이었다. 버크스 교수 부부의 중매로 이들 사이에 편지가 오간 끝에 결혼으로 치닫는 숨가쁜 시절이 있었다. 그가 바로 지난달 8순잔치를 치른 고경주, 고홍주 차관보등 미국서 최고로 성공한 6남매의 부모이다.
50년대 뉴욕에서 미국의 소리 방송국에 다녔던 박준규와 허드슨강변에 있던 램슨출판사에서 하역작업을 했던 강원룡, 시카고의 일본계 장남감 수입회사에서 오더 피커로 일했던 김일평 등도 비교적 덜 힘든 아르바이트로 유학생활을 보낸 사람들이다.
▲유학생 시절의 고광림-전헤성 커플
■ 뉴욕대 다니던 최인규
이승만 신임 장관직 두루거쳐...결국 사형대 이슬로
한편 이 무렵 뉴욕대를 다니던 최인규(전 내무장관)는 당시 미국이 전후 한국의 경제원조를 돕던 기관 운크라의 한국측 책임자로 임명되어온 관리였다. 그는 뉴욕생활 5년동안 주어진 임무와 공부 외에 가끔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독자란을 통해 반박했다. 때로는 이승만을 두둔하는 글을 자주 실었다. 그리고 이런 기사내용이 이승만에게 직접 전달되어 신임을 얻은 인물이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인사를 드릴 때 이승만이 그에게 ‘웰던’이라고 했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로 최인규는 승승장구, 외자청장, 교통장관을 거쳐 내무장관에 올랐다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의 성공으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뉴욕에서 그와 가깝게 지냈던 강원룡은 최인규의 인물 됨됨이가 좋았다고 했다. 인간성이 좋고 책임감 있는 소신의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가 사형을 당한 것은 하수인에 불과했는데도 영리한 배후인물들의 제물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선장병 위문을 수행한 최인규(맨 왼쪽). 그 옆은 김정렬 국방장관, 양산을 받쳐든 사람을 곽영주 경무관, 대통령과 곽 경무관 사이에 이강석 소위가 보인다.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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