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위협.자주 국방위해 극비 추진
한국은 1970년도 중반에 자주국방을 위해 핵탄두가 탑재된 중거리 미사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 주요 군사목표물을 위협할 능력을 갖추기 위한 극비 프로젝트 “890”을 추진한 사실이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에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 한국정부가 자주국방 노력의 일환으로 핵무기 개발과 중거리 미사일 개발 등 비밀리에 각종 프로그램들을 추진했던 사실은 이미 공개된 여러 미 비밀해제 문서들에 의해 공식 확인된 바 있으나 이들 개별 프로그램을 엮어 북한 전역을 사정거리에 둔 중거리 핵미사일 개발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실과 이 같은 프로젝트인 “890”의 존재 자체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프로젝트 “890”은 당시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적극 반대한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12월 한국의 모든 공식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함과 동시에 함께 중단된 것으로 밝혀져 현재 한반도 지역과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한 핵 문제를 접근하는데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 그 실체와 내역이 더욱 주목된다.
뉴욕한국일보가 입수한 미 CIA ‘국가외국평가센터’(NFAC)의 ‘한국: 핵개발과 전략적 정책결정’ 보고서(1978년 6월 작성)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74년~1976년 공식 추진된 한국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 ▲전략적 정책, ▲핵 프로그램 개발, ▲정책결정 경향, ▲핵 관심과 선택 등 상황을 종합 분석한 것으로 당시 한국의 자주국방 계획의 일환이었던 프로젝트 “890”의 내역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보고서는 프로젝트 “890”과 관련, “(한국) 국방부 반독립 부속인 ‘국방과학연구소’(ADD)
에서 1972년 말부터 물리학자 한명이 폭발 기술자의 지원을 받으며 핵무기 설계 연구를 시작했다.
핵무기 프로그램은 1974년과 1975년에 크게 확장, 본격 구체화돼 ‘890’으로 명명된 프로젝트가 핵과 화학 탄두 연구를 미사일 설계 노력과 결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보고서는 이어 프로젝트 “890”의 감독권은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게 주어졌고 “그 아래 단계는 제각기 별도의 예산과 연구 스케줄 및 연구 기간이 주어진 3개 실무 팀(핵, 화학, 미
사일) 부서들이 엄격히 분리된 상태로 관리됐으며 프로젝트는 이들 3개 팀의 연구가 서로 결합될 때 까지 생존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어 890” 프로젝트가 실무자들마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극비로 추진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는 또 프로젝트 “890”의 3개 실무 팀과 관련, 핵 분야에 대해서 “박 대통령은 ‘890’의 핵무기 설계 분야를 1974년 12월 재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국방과학연구소’는 해외에서 양성돼 취직한 한국인 과학자들을 귀국시키는 모집 노력에 착수했다”며 “핵무기 설계 팀은 1975년 중반에 들어 탄두 구조, 고성능 폭약 제작과 컴퓨터 코드 등 3개 실체적 부분그룹으로 분류되면서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됐고 전체적인 탄두 설계 노력은 박사학위를 소지한 수십 명(Few Dozen) 이하의 과학자들과 이보다는 약간 많은 숫자의 기술자들의 뒷받침으로 구성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화학과 미사일 팀 대해서는 “1975년 2월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화학 탄두 팀은 10명 주요 연구원들로 형성됐다. 이에 반해 미사일 팀은 976년 중반에 들어 250명 이상의 연구원들과 기술자들을 고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미사일 팀은) 여려 행정 단위 이외에도 추진제, 기술, 전자, 실험, 분석과 컴퓨터 지원 등 5개 실체적 부분 단위로 구성됐다”고 보고해 프로젝트 “890”에 관련된 총 인원을 300여명으로 파악했다.
보고서는 한국이 프로젝트 “890”을 추진하게 된 동기를 ▲ 한국 전쟁이후 서울을 향한 평양의 감퇴되지 않는 적대 행위 및 대폭 강화된 북한의 공격 능력과 ▲미국의 대한국 안보 공약에 대한 신뢰와 특히 핵무기로 한국을 보호할 워싱턴의 의지력에 대한 한국의 의혹이 커짐에 따라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게 됐고 미국의 핵무기를 대신하기 위한 한국의 대북 억제력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애당초 미사일 탑재 핵탄두에 초점을 두고 계획, 추진 됐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보고서는 특히 한국의 미사일 시스템 개발 노력과 관련, 당시 북한이 비무장 지대에서 불과 38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서울을 타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60 킬로미터 구 소련산 ‘프로그’(FROG) 로켓과 130mm 대포로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최전방에서 발사하는 지대지 사정거리 180 킬로미터 미국산 ‘나이키 허큘리스’(Nike Hercules) 미사일 이외로는 비무장 지대에서 150 킬로미터 떨어진 평양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로켓 또는 대포가 없어 한국 정부가 “북한이 남한을 위협할 수 있는 정도에 맞춰 평양을 단순히 군사적 보다는 정치적 차원에서 위협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데 사로잡혀 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중반에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의 지대지 사정거리를 350 킬로미터로 개량, 비무장 지대 후방에서 평양과 남포, 원산 등 북한의 주요 항구는 물론, 중국의 주요 물자가 북한으로 보내지는 압록강 도시 신의주와 함흥, 안주 등 북한의 대부분 군사지휘센터 및 물자 집결소를 타격할 능력을 갖춘 ‘미사일 개량 프로그램’ 개발을 지시했고 그 후 이 프로그램과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화학 무기 개발 프로그램 등 3개 프로그램을 엮은 프로젝트 “890”이 계획, 추진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은 1974년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가 캐나다와 NRX종 중수로 연구용 발전기, 프랑스와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직접 추출할 수 있는 소형 재처리 시설의 구매 협상을 시작하고 이듬해 핵연료 제작 연구 실험실 매입을 위한 벨기에 정부와의 대출 협상을 벌이는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도가 핵실험(1974년 5월)을 실시함에 따라 곧바로 가해진 미국과 캐나다의 압력으로 인해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히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관련 시설 매입 계획이 무산되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NRX종 중수로 연구용 발전기를 비롯한 이들 관련 시설을 자체적으로 설계, 건축키로 하고 1976년 말에 한국원자력연구소 산하에 ‘한국핵연료개발공단’(KNFDI)을 신설했으나 결국 이 프로그램도 경제지원과 한미관계를 볼모로 한 미국의 강력한 외교압력으로 인해 같은 해 12월 프로젝트 “890”을 비롯한 모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전격 중단되며 함께 취소됐다.
이와 관련 CIA 보고서는 “박 대통령은 1976년 12월 국방과학연구소의 프로젝트 ‘890’과 핵연료개발공단의 NRX 설계 프로젝트가 취소됨에 따라 한국의 핵 프로그램의 방향과 관련 연구소들의 연구를 분해 검토하는 책임을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 수석비서관에게 넘겨주었다. 오(원철)는 원자력연구소와 핵연료개발공단의 공개 부분 핵 연구를 국제사회가 용납하는 분야로 돌리는 일을 최우선 순위로 다루고 핵 연구 분야의 기획 책임을 점차 내각 차원으로 이전시키려 하고 있다”며 “한국의 원자력 발전과 연구 활동 기획이 장기적 경제 개발 프로그램을 위한 조율된 정책결정 철차와 서로 맞물리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이 병
행 추진됐던 한국의 핵 프로그램이 단순한 민간용 공개 핵 프로그램으로 변환된 시점을 확인하고 있다.
■ 프로젝트 ‘890’ 왜 중단됐나
믹구이 묵인할 것이라는 오산 결국 미 외교압력에 무릎
미국의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7월25일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아시아국가들은 미국의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안보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또 지미 카터 대통령은 전임 제랄드 포드 대통령의 약속을 깨고 1971년 3월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 병력 감축을 감행했다. 이는 한반도 전쟁 발발 경우 한국을 보호할 미국의 의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불신을 한층 높였고 한국은 북한의 끊이지 않는 무장공비 침투와 한국전쟁 이후 꾸준히 강화된 북한 군사력이 군사적은 물론 정치적 차원에서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불안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11월 자주국방 강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는 극비 프로그램, 또 이들 프로그램을 엮은 프로젝트 “890”이 마련, 추진된 것이다.그러나 1974년 12월 시작된 한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불과 2년만인 1976년 12월 전격 중단됐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한국 정부가 이 같은 프로그램에 도입에 따를 미국의 반응을 잘못 예측했기 때문이다.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명백히 할 경우 동북 아시아에 어떠한 전략적 반향이 일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미국의 반응에 대해서는 “워싱턴이 핵무기 개발을 묵인할 것”이라는 커다란 오산을 범했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워싱턴이 텔아비브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무기는 물론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국방지원을 제공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케이스에 유추했다.즉 미국이 단기적으로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겠지만 결국 독립된 핵 능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묵인할 것이라는 착오를 범한 것이다.
실제로 이 같은 오산은 1975년 말부터 워싱턴이 핵연료 재처리 문제를 놓고 한국을 강력히 압박하기 시작하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외교압력 강도가 급속히 고도로 높아져 완전한 자주국방 또는 한미관계 유지에 따른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12월 한국의 모든 핵무기 개발 노력을 전면 중단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이러한 결과는 30년이 지난 현재 한국보다 훨씬 뒤늦은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이 지난해 성공적 핵실험을 주장함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고강도 핵포기 압력을 받고 있는 북핵 문제의 현주소와 북핵으로 인해 커다란 안보위협을 받고 있는 한국의 현위치를 역사를 되돌아보며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신용일 기획취재 전문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