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 관객을 향해 질주하며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왕과 사는 남자’이다. 강원도 영월을 배경으로 비운의 왕 단종의 이야기를 웃음과 감동으로 풀어낸 소박하고 아름다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관객으로 갔다가 백성이 되어 나온다며 손수건을 들고 가라는 지인의 말에 이끌려 나 또한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영화관을 찾은건 참 오랜만인 것 같다.
단종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진 강원도 영월은 내게도 각별한 기억이 스며있는 곳이다. 어떠한 사연으로 스무 살 중반 무렵 약 두어해의 시간을 그곳에서 평온히 머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뉘는데 영서쪽에 위치한 영월은 정선, 평창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며 기대어 선 삼형제처럼 고요히 이어져 다듬어진 내륙 산골 마을이다. 그곳에는 늘 산의 향기가 은은히 스며 있었고 자연의 숨결은 말없이 흐르며 추억의 시간을 감싸 안고 있었다.
짧았던 그 시간들을 보내며 만난 영월 사람들은 정이 깊으면서도 말수가 적고 속이 단단한 기개를 지닌 사람들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세조의 명으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라”는 엄혹한 어명이 내려졌음에도 차디찬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라는 인물은 “옳은 일을 하다 화를 입는 것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역사적인 명언을 남기게 된다.
주군에 대한 충절과 책임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몸소 증명해 보였으며 거기에 더해 그가 행한 사실들을 알고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던 영월 사람들의 의리와 충정은 따로이 높이 평가되어질만한 일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는 순간이었다. 사약을 받아들이는 자체가 곧 억울한 죄를 인정하고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것은 연약한 몸으로 드러낸 마지막 항거였으며 잘못된 권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단호한 그의 저항은 모두에게 강한 울림과 함께 깊은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 넣기에 충분했다.
젊은 시절 영월에 머무는 동안 장릉과 청령포를 찾고 솔향기 그윽한 소나무 숲길을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때는 아무생각없이 스쳐 지나쳤던 풍경들이었지만 이제는 그 곳곳에 스며 있던 역사와 사유의 흔적들이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처럼 또렷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고 하지만 진실은 비록 더디더라도 결국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일깨워 준다. 그래서일까. 중년이 된 지금 삼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한 번 그곳 영월을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나에게 영월은 이제 단순한 기억의 장소를 넘어 삶과 역사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여운의 땅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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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숙 미주통일연대 워싱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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