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빠지는 와인은 샴페인이다. 오래전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실제로 오랜 세월 와인을 벗 삼다보니 저절로 샴페인 매니아가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달짝지근한 와인을 좋아하다가, 곧 카버네 소비뇽 같은 진하고 파워풀한 레드로 옮겨가게 되고, 얼마간 와인 구력이 쌓이면 섬세한 피노 누아를 즐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샴페인(스파클링 와인)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또 모두가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미각은 발달되지 않았을 땐 강하고 진한 맛에 먼저 반응하지만, 팔레트가 예민해질수록 부드럽고 복합적이고 조화로운 맛을 더 깊이 음미하게 된다. 요즘 시즌 2가 나온 ‘흑백요리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최상급 셰프들이 추구하는 맛은 양념이 세고 강한 음식이 아니라, 최소한의 간으로 최대한 재료의 맛을 살린 그윽한 요리인 것이다.
샴페인의 마력은 일반 와인보다 한 단계 더 복잡한 양조과정 때문에 생성된다. 여러 포도품종(샤도네, 피노 누아, 피노 뮈니에)을 섞고, 여러 해의 와인을 섞는 넌 빈티지(NV) 블렌딩 기술도 까다롭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발효에서 만들어지는 기포다. 이 예민한 버블, 톡 쏘는 탄산 개스의 청량감이 중독성을 부르는 것이다.
좋은 샴페인일수록 기포의 크기가 작고 오래도록 올라온다. 한 조사에 의하면 좋은 샴페인 한 병에서 무려 4,900만개의 버블이 나온다고 한다. 이것은 2차 발효의 섬세한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적인 샴페인 양조법은 1차 발효한 와인을 병에 담고, 각 병마다 당분과 이스트를 첨가하여 2차 발효를 일으킨 후, 거기서 생성된 개스를 병속에 가둬놓는 것이다. 말은 간단해 보이지만 일반 와인보다 훨씬 많은 공정과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는 수백년 전부터 지금까지 전통양조법을 고수하면서 특유의 향과 맛을 지키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 나오는 싸구려 발포성와인은 훨씬 쉬운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큰 탱크에서 한꺼번에 2차 발효시켜 병에 옮겨 담거나, 아니면 일반와인에 인공적으로 탄산 개스를 주입하는 것이다. 스파클링 와인은 세계각지에서 생산되지만 프랑스 샴페인의 섬세한 맛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 샴페인의 가격이 유독 비싼 이유가 그 때문이다.
샴페인은 가장 싼 것이 40달러 정도이고, 그 위로는 수백 수천달러까지 올라간다. 트럼프 대통령이 붙인 관세 때문에 더 올랐는데, 지난 봄 샴페인에 200% 관세를 매긴다는 위협으로 와인시장이 크게 놀랐지만 실제로는 15% 오른 데서 멈췄다. 하지만 0%였던 과거에 비하면 이마저도 상당한 부담이라 해야겠다.
다행인 것은 캘리포니아에서도 훌륭한 스파클러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샹동(Domaine Chandon), 멈 나파(Mumm Napa), 슈람스버그(Schramsberg), 로데레 에스테이트(Roederer Estate), 도멘 카네로스(Domaine Carneros), 아이언 호스(Iron Horse), 글로리아 페러(Gloria Ferrer) 등 20~40달러 선에서도 전통양조법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샴페인은 보통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마시지만 사실은 언제 어느 때 마셔도 좋은 와인이다. 기쁠 때는 더 기뻐지고, 우울할 때는 기분을 달래주며, 피곤할 때 생기를 주고, 더울 때는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며, 입맛 없을 때는 무엇이든 먹고 싶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샴페인이다.
식전주이면서 모든 음식과 폭넓게 어울리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감을 주며 피로한 미각을 리셋해 주는 와인, 아침 브런치에도 디너 만찬에도 곁들이고, 애피타이저와 메인요리는 물론 김치와 라면과도 어울리는 와인이다.
1961년 런던의 한 기자가 프랑스의 유명한 샴페인하우스 사장인 마담 릴리 볼랭제에게 언제 샴페인을 마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행복할 때 마시고 슬플 때도 마십니다. 때로 혼자 있을 때도 마시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의무적으로 마시죠. 배가 고프지 않을 때는 홀짝거리고, 배가 고플 때는 들이킵니다. 그렇지 않고는 목마르지 않는 한 마시지 않아요.” 결국 항상 샴페인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표현한 것이다.
오늘이 한해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은 새해의 첫날이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보니 여러 사건이 있었고 아픈 데도 많았지만, 끝으로 남은 것은 감사함뿐이다. 사실 이렇게 건강하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도 축하할 일 아닌가?
요즘은 축제와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 자꾸 감사거리를 찾고, 자꾸 축하할 일을 만든다. 축하가 잦으면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을 따고, 코르크마개 펑 열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더 신나고 행복해져서 웃게 된다. 작은 일에 자주 축하하고 자주 감사하고 자주 기뻐하는 일상, 그것으로 올 한해도 충분했다. 그저 오늘, 이 순간, 감사하고, 축하하자.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