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나의 중학교 뒤뜰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물 위 수련의 맑은 꽃잎도 소녀의 감성을 흔들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병아리들이 처음 그 조각상을 보았을 때는 참으로 부끄럽고 당혹스러웠다. 우락부락 근육질의 남자가 벌거벗고 앉아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것은 프랑스 유명한 조각가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설명 팻말을 보고서야 우리는 미간의 깊은 주름이랑 팔의 근육도 만져볼 수 있었다. 조각과 친숙해지면서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이리도 골똘히 하고 있을까 궁금증도 생겼다.
오늘 2025년의 끝자락에 서니 뜬금없이 열네 살 소녀들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제는 그 남자의 생각을 말해줄 수 있는데.
로댕은 파리 장식미술관의 의뢰로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모티브 삼아 <지옥의 문>을 제작했다. 그 문 안에는 약 200여 점의 군상이 저마다의 정념과 고통 속에 뒤엉켜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금지된 사랑에 휘말린 파올로와 프란테스카, 아사(餓死)의 공포 앞에 자식의 시신을 먹으며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린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이 밖에도 욕망과 죄의식, 후회와 고뇌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시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격렬하고도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다. 로댕은 이 광경을 통하여 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 지옥이란 타자에 의한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집착의 굴레에 갇혀 자신을 갉아먹는 ‘내면의 감옥’이라는 사실이다. 외부의 심판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심판이라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아비규환의 난장 꼭대기에 <생각하는 사람>이 고요히 앉아있다는 것이다. 지옥의 입구에 새겨진 ‘이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절망적 선언을 발밑에 둔 그는, 고통을 외면하지도 그 안으로 뛰어들지도 않는다. 다만 응시한다. 그는 온몸으로 말한다. 절망을 마주하는 정신이 살아있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는 아직 지옥의 문턱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시간의 문이 열리고 있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화사한 말로 새해를 포장하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채 치우지 못한 고난의 잔해와 삶의 해묵은 과제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어쩔 것인가. 현실 도피로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으로 맞설 것인가. 다짐이 필요한 시간이다.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을 통하여 삶의 문제와 똑바로 눈을 맞추며 절망을 정면으로 응대할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고통을 객관화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올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문턱에 앉아 고통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의미를 조각해 나가는 긍정적인 의지다. 스스로 만든 생각의 덫에 함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비극 속에서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남을 수 있다. 새로 주어지는 귀중한 시간이 온다. 새해에는 우리 각자가 자기 삶의 정점에 앉아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비록 발밑이 소란스러울지라도.
2026년이 우리에게 말한다. “여기 들어오는 사람은 희망을 가져라”
<
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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