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타계에 온 세계가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로스앤젤레스만큼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곳은 없을 것이다.
LA는 그의 건축예술의 뿌리였고, 상상력이 만개한 곳이었으며, 그의 건축 유산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프랭크 게리는 17세 때 캐나다로부터 이민 온 후, LA의 방대하게 열린 공간 속에서 모험하고 도전하며 정형화된 건물의 한계를 넘어서는 파격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직선만 있던 건물에 곡선을 부여했고, 딱딱하고 닫힌 공간을 풀어헤쳐 파도가 넘실대고, 물고기가 튀어 오르며, 집시가 춤을 추는 모습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 동적인 상상력으로 세상에 없던 건물들을 창조해낸 그는 1989년 건축계 최고상인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프랭크 게리는 70여개의 독특한 건물을 세계 곳곳에 지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과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두 건축물의 배경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
먼저 시작된 것은 디즈니 홀이었다. LA필하모닉의 상주공연장이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의 음향이 나쁘다는 불만이 계속 제기되자 1987년, 월트 디즈니의 아내 릴리안이 5,000만달러를 기부하며 새 건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차장까지 지은 상태에서 공사는 중단되었다. 예산이 계속 초과하는데다, 희한한 모양의 디자인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보이면서 모금이 끊긴 것이다. 1994년부터 5년간 망치소리는 멈췄고, 건축현장은 다운타운의 흉물처럼 방치되었다.
한편 그동안 스페인의 최북단 도시 빌바오는 큰일을 벌이고 있었다. 과거 광산업과 제철업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20세기 후반 철강산업이 쇠퇴하면서 공해와 실업률이 치솟아 죽어가던 이 도시는 살 길을 찾아 과감한 도박을 했는데, 1991년 시 전체 자원을 투자해 구겐하임 뮤지엄을 유치한 것이다. 그 디자인을 프랭크 게리가 맡았고, 건축물은 1997년 완공되었다.
거대한 범선이 화려하게 돛을 펴고 강변에 정박해있는 듯한 모습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 건축물 하나로 빌바오의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졌고, 이후 유명 건축가들이 하나둘 이 도시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연간 15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됐다. 이것을 ‘빌바오 효과’ 혹은 ‘빌바오의 기적’이라 부르며 많은 도시가 벤치마킹하고 있다.
구겐하임 뮤지엄의 성공을 본 LA필 관계자들은 그제야 프랭크 게리가 지으려는 건축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재정모금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1999년 공사가 재개돼 2003년 디즈니 콘서트홀이 완공되었다. 지금 디즈니 홀은 LA의 최고 명물로 손꼽힌다.
때때로 LA필 연주회에서 프랭크 게리를 볼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애호가인 그는 자신이 만든 디즈니 홀을 자주 찾았고, 늘 앉는 자리에서 지인들과 담소하는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음악에 대해 예민한 그는 특히 어쿠스틱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그가 짓는 거의 모든 연주시설에서 음향설계자 야수히사 토요타와 협업하여 최상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세계에서 가장 어쿠스틱이 좋은 연주장의 하나로 꼽히는 디즈니 홀에서 기침소리가 유난히 가깝고 거슬리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음악인, 화가, 작가들과 교류하며 ‘예술가 같은 건축가’가 되었다. 그가 지은 수많은 미술관과 연주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전시의 디자인과 공연무대 디자인을 통해서도 천재적인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라크마(LACMA)에서 열렸던 켄 프라이스 작품전(2012)과 알렉산더 칼더 작품전(2013)이다. 둘다 조각품이어서 3차원의 디스플레이가 키포인트인데, 게리는 이를 특별한 통찰력과 감각으로 배치해 작품들이 선명하게 돋보이도록 설치했다. 라크마는 2016년 프랭크 게리의 건축인생을 조명하는 대형 회고전을 열었다. 60년대부터 작업한 200여개 드로잉과 60개의 모델을 볼 수 있었던 인상적인 전시였다.
LA필과의 오페라 협업도 빼놓을 수 없다. 2012년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무대였다. 디즈니 홀의 합창석을 다 들어내고 오케스트라를 검은 공간으로 밀어낸 후, 구겨진 거대한 흰 종이들로 초현실적인 스테이지를 창조했다. 얼마나 혁신적인 무대였던지, 음악보다 그 시각적 감동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작년 1월에는 바그너의 ‘링사이클’ 중 첫 번째 ‘라인의 황금’의 무대를 디자인했으며, 두 번째 프로젝트인 ‘발퀴레’가 내년 5월 소개된다. 그의 마지막 무대디자인이 될 것이다.
LA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게리의 독특한 건물들은 산타모니카의 게리 레지던스, 로욜라 로스쿨, 모카 게픈 콘템포러리, 익스포지션 팍의 스페이스 갤러리, 베니스의 쌍안경빌딩, 브렌트우드의 슈나벨 하우스 등 거의 20개에 달하고, 현재 공사 중인 것만도 콜번 스쿨 퍼포밍 아츠 센터, 베벌리힐스의 루이뷔통 플랙십 스토어, LA 강 프로젝트 등 여러 개가 남아있다.
2019년 지퍼 홀에서 열린 프랭크 게리의 90세 축하음악회에 참석했었다. 그때 그는 건강하고 정정했으며 100세 넘어서도 열정적으로 일할 것처럼 보였다. 은발의 작은 거인, 이제 편히 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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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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