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모아온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지난 주말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개막됐다. 40주년을 맞는 LA 오페라의 2025-26시즌 개막작이자, 그 성장을 20년간 주도해온 제임스 콘론 음악감독의 마지막 시즌오프너란 점에서 의미가 특별한 공연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말에는 바로 길 건너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 필하모닉의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이 그의 마지막시즌 콘서트를 개막하게 되니, LA 클래식음악계의 한 시대가 닫히는 듯한 서운함이 몰려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아직 두 단체의 차기 음악감독은 정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제 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될 것이란 기대를 품어보기도 한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젊은 에너지가 충만한 작품이다. 젊은 사랑, 젊은 혈기, 젊은 싸움, 젊은 춤과 노래가 두 시간 넘게 무대를 꽉 채운다. 1957년 초연된 뮤지컬이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청중들에게 신선한 흥분을 안겨주는 것은 아마도 이를 만든 주역들이 당시 파릇파릇 젊은 예술계의 신성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판 댄스공연으로 만들기 위해 처음 레너드 번스타인을 찾아간 사람은 안무가 제롬 로빈스였다. 여기에 극작가 아서 로렌츠가 합류했고, 나중에 작사가 스티븐 손드하임이 조인하여 브로드웨이의 역사를 다시 쓴 클래식 뮤지컬이 탄생했다.
훗날 각 분야의 전설이 된 이들은 지금은 모두 타계했지만, 의기투합해 작품을 만들 당시 30대 청년들이었다. 또한 모두 유대인이었고 동성연애자였으며 매카시즘(반공산주의) 열풍 속에 입지가 위태로운 예술가들이었다. 사회적 소수라는 이들의 공통적 연대가 거칠고 활기찬 에너지의 약동을 부르는 창조의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LA오페라가 처음 올리는 이번 무대는 제롬 로빈스의 역동적인 연출과 안무가 살아 숨 쉬는 오리지널 프로덕션으로, 뮤지컬과 발레 안무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로빈스의 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한 공연이다.
무엇보다 남가주 출신의 한인 테너 듀크 김이 남자주인공 토니 역을 맡아 열연한 것이 특별히 자랑스러웠다. 듀크 김은 바로 지난 시즌, 샤를 구노의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를 현대판으로 각색한 뮤지컬에서 로미오의 현신인 토니 역을 맡았다는 사실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만큼 로맨틱한 주인공 배역에 어필하는 목소리와 이미지의 가수로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번 공연에서 듀크 김은 로미오 때와는 또 다른 사람이 된 듯 열정적인 노래와 연기,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으로 무대를 휘어잡아 박수갈채를 받았다.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신나는 춤과 노래, 로맨스와 아리아가 눈과 귀를 사로잡는 뮤지컬이다. 맨해튼 서부 슬럼가의 두 패거리, 백인 갱단인 제트파와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출신의 샤크파가 대립하는 와중에 양측의 주요인물인 토니와 마리아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불같은 사랑과 비극을 노래한다.
1957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토니상 안무상과 무대 디자인상을 수상했고, 1961년 제작된 나탈리 우드 주연의 영화는 무려 10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투나잇’ ‘마리아’ ‘섬웨어’ ‘아이 필 프리티’ ‘아메리카’ 등 감미로운 노래들과 오케스트라 연주, 발레와 현대무용, 재즈댄스와 라틴 에너지가 스테이지를 가득 채우는 갱단의 군무 장면들이 역동적이고 화려하다.
그런 한편 백인과 이민자 집단의 싸움이란 점에서 인종차별과 갈등, 좌와 우가 증오로 분열된 현대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은,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적인 언사가 난무하고, 푸에르토리코 아가씨들이 합창하는 ‘아메리카’의 가사는 이민자들이 꿈꾸는 미국의 허상, 양면을 적나라하게 노래한다.
“난 미국에 사는게 좋아 미국에서는 모든게 자유로워(작은 대가를 치른다면 말이지)/ 고층건물, 캐딜락, 산업부흥의 나라(열두명이 한 방에서 살아야 하는 곳)/ 넓은 공간의 새집들이 많지(그만큼 더 많은 문전박대)/ 미국에서는 다 괜찮아(네가 완전 백인이라면 그렇지)/ 여기서는 자유롭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네 주제를 알고 벗어나지 않으면 말이야)”
번스타인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구상하던 메모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인종적 관용을 위한 전면적인 호소’(An out and out plea for racial tolerance). 불법이민자에 대한 무관용 급습과 추방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를 내다본 듯한 호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LA오페라가 40주년을 맞는 시즌의 개막작으로 정통 오페라가 아닌 뮤지컬을 택한 것은 기묘하게도 적절해 보인다. LA오페라의 뮤지컬 공연은 처음이 아니다. 1990년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의 ‘오클라호마’를 공연한 적이 있고, 2018년 번스타인 100주년에 그의 뮤지컬 ‘캔디드’를, 2019년에는 크레이그 루카스의 ‘피아자의 빛’(Light in the Piazza)을 공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특별하다. 이례적으로 10회 공연이 예정되었고, 열렬한 환영과 축제의 팡파르가 들려온다. 번스타인이 보낸 클래식뮤지컬의 러브레터. 20일과 21일 모두 만석이었고, 8회 공연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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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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