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넷플릭스에서 대단히 불편한 2편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다. ‘제프리 엡스틴: 추잡한 부자’(Jeffrey Epstein: Filthy Rich)와 ‘길레인 맥스웰: 더러운 부자’(Ghislaine Maxwell: Filthy Rich)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각각 2020년과 2022년에 개봉됐으나 큰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요사이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틴 파일의 연루설이 떠들썩해지자 시청률이 오르고 있다.
4부작 시리즈인 ‘엡스틴’과 100분짜리 영화 ‘맥스웰’은 같은 감독(Lisa Bryant)이 만들었다. 30년 넘게 어린소녀들만 골라 수욕을 채운 억만장자 성착취범과 그를 위해 ‘먹이’를 사냥하고 상납해온 여성공범의 전모를 피해자와 주변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파헤쳤다.
여기에 트럼프가 얼마나 깊이 연루됐는지, 이 스캔들로 과연 그가 위기를 맞았는지, 엡스틴의 죽음이 정말 자살인지 등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다큐에는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등장하는데 트럼프는 함께 찍은 사진들 외에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주장대로 오래전 끝난 관계일 수도 있고, 반대로 추악한 진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이 의혹에 대해서는 지금 마가(MAGA)들이 날뛰고 있고, 정계에서도 초당적으로 파일 공개를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에는 밝혀지리라 믿는다.
이 스캔들에는 기이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제프리 엡스틴 혼자의 범행이 아니라 바로 그의 연인이 ‘마담뚜’ 채홍사였다는 점이다. 또 두 사람은 세계 최고위 권력자들과 친하게 지낸 파워커플이었는데, 이들과 어울렸던 사람들은 모두 엡스틴이 소아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15년간 엡스타인과 각별한 관계였던 트럼프는 2002년 한 인터뷰에서 “제프는 정말 멋진 놈”이라면서 “그는 나만큼이나 예쁜 여자들을 좋아하는데 그중에 어린여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자기만 미성년자들을 데리고 논 것이 아니라 정재계의 지인 명사들에게 보내 ‘돌림방’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여중고생 뻘의 소녀들을 개인제트기(일명 ‘롤리타 익스프레스’)에 태워 미전국과 세계를 데리고 다니며 성접대 하도록 매수했다. 뉴욕과 팜비치의 저택, 뉴멕시코의 별장, 카리브해의 개인 섬, 파리와 런던의 아파트로 끌고 다니며 성 착취를 일삼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영국 앤드류 왕자의 미성년자 성폭행 스캔들이다. 2014년 버지니아 주프레는 “17세였던 2001년 엡스틴의 소개로 앤드류 왕자를 만났으며 런던과 맨해튼에서 세차례 강제 성관계를 가졌다”고 폭로했다. 앤드류 왕자는 이를 부인했으나 결국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했고, 왕실의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주프레는 며칠전 트럼프가 “엡스틴이 훔쳐갔다”고 주장한 바로 그 여성이다. 그녀는 마라라고 리조트 스파에서 일하던 중 길레인의 감언이설에 속아 2년간 성노예가 되었으며, 훗날 이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후 엡스틴의 범죄를 폭로한 핵심증인이 되었다. 그녀는 피해자들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세우고 투쟁해왔으나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돈, 권력, 섹스가 최고수준에서 남용된 사악한 성매매범죄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될 수 있었을까? 많은 피해자들은 그 열쇠로 길레인 맥스웰을 지목한다. 그녀가 소녀들을 리크루트하고, 엡스틴의 취향에 맞게 훈련시켰으며, 여러 사람과 강제 성관계를 갖도록 ‘그루밍’했다는 것이다. 다들 엡스틴보다 그녀에게 더 큰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다.
길레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영국 미디어재벌이며 정치가이고 막강한 파워를 가진 미러그룹 회장 로버트 맥스웰의 딸로, 매일 호화로운 파티 속에서 화려하게 성장한 금수저였다. 옥스퍼드 출신에 아름답고 지적이며 매력적인 사교계 총아였던 그녀는 그러나 1991년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죽고, 거액의 회사 연금펀드를 횡령한 사실이 밝혀져 집안이 파산하면서 곤경을 맞는다. 그러나 뉴욕 사교계로 옮겨온 뒤 9세 연상의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틴을 만나면서 다시 살아났다. 세련되지 못한 신흥부자와 영국 상류층 매너가 몸에 배었고 유명인사들과 친하지만 돈이 없는 여인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밀착되었다.
처음엔 연인이었지만 차츰 길레인은 어린소녀를 좋아하는 엡스틴을 위해 스스로 ‘먹이’ 조달에 나섰다. 미술관에서, 백화점에서, 나이트클럽에서 예쁜 소녀를 만나면 어김없이 다가가 모델로 만들어주겠다, 학비를 도와주겠다, 커리어가 촉망된다며 유혹했고 피해자들은 길레인이 너무 멋지고 세련된 여성이어서 의심없이 따라갔다고 했다. 한번 그루밍 된 소녀들에게는 친구를 데려오면 200달러를 준다고 꼬드겼고, 다단계 성매매 피라미드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걸려든 여성의 숫자는 최소 150명, 어떤 이는 500명이 넘는다고 말한다.
2019년 8월, 수감된 엡스틴이 재판도 시작되기 전에 사망하자 그때부터 모든 관심은 길레인에게 집중됐다. 그녀는 곧바로 종적을 감췄으나 1년 후 체포됐고 6개 혐의로 기소되어 2022년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2주전 트럼프의 법무차관이 찾아가 면담한 후 수감조건이 훨씬 나은 교도소로 이감됐다. 어떤 거래가 오갔을지 안 봐도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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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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