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이정동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교수
20년간 전혀 변하지 않은 주력 산업
모방하려 해도 이미 새 설계도 나와
압축 성장 ‘추격형 모델’ 생명 다해
게임의 룰 선도 못 하면 서서히 침몰
도전보단 리스크에 민감한 CEO
中 다양한 생태계서 실험물 쏟아내
쟁여둔 음식만 꺼내먹는 한국 위협
도전 이끌고 인내하는 리더십 필요2015년이었다.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26명이 의기투합했다. 당시 한국 산업의 위기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대한민국 미래 제언을 담은 책을 냈다. 제목이 ‘축적의 시간’. 이 작업을 주도한 이정동 서울대 공과전문대학원 교수는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신화를 써온 우리 산업이 지금 경쟁력 위기를 맞고 있다. 위기가 어느 특정 산업만이 아니라 전 산업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올해 들어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라 수년 전부터 그 전조를 보이며 구조적으로 심화하고 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대 공학관 연구실을 찾았다.
▲네 번째 블랙박스 해체- 교수님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딱 한 문장으로 본인을 소개하신다면요.
“어렵네요. ‘탁월한 기술 혁신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연구하는 사람’, 이 정도가 어떨까요.”
- 부연을 해주시죠.
“뉴턴이 우주의 원리를, 다윈이 생물의 다양성을, 그리고 프로이트가 인간의 마음을 풀어냈잖아요. 그들이 모두 블랙박스를 해체한 거죠. 저는 새로움이 탄생하는 구조를 풀고자 합니다. 창의적인 천재가 아니라도 특정한 조건만 충족되면 누구라도 혁신적 발명과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농담 삼아 네 번째 블랙박스 해체라고 얘기하곤 합니다.”
- ‘축적의 시간’ 이후 일관되게 던지는 제안으로 보이는데요.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나라가 2000년 전후까지는 ‘추격형 모델’을 통해 눈부신 압축성장을 했죠.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개념설계(concept design), 그러니까 혁신적 설계도를 가져와 빠르게 흉내 낸 결과예요. 하지만 이제는 글로벌 환경이 추격형 모델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바뀌고 있어요. 모방하려고 하면 이미 선진국에선 새로운 설계도가 등장하는 거죠. 지금까지의 성장 공식을 버려야 해요. 우리가 선도해서 게임의 룰을 만들지 않으면 서서히 침몰할 수밖에 없습니다.”
-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이 그 시작이라고 보시는 거군요.
“맞아요. 세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최초의 질문이 있어야 하고요. 또한 희미한 해법으로부터 출발해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축적하면서 버전을 계속 업그레이드하는 스케일업(scale-up·확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 뒤에라야 우리도 독창적 설계도(개념설계)를 손에 쥘 수 있어요. 독일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가 위대한 것은 단지 뛰어난 수학자여서가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흥분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져서였다고 봅니다.”
사실 ‘패스트 팔로어’에서 벗어나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는 주문은 너도나도 했다. 단지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을 뿐. 일각에서는 남 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훈수만 두느냐는 말도 나오더라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최초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지 직접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게 작년부터 시작한 ‘그랜드 퀘스트’다. 올해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역노화 기술을 이용해 인간은 다시 젊어질 수 있을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신종 바이러스 감염을 예방하는 백신을 선제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일반인공지능(AGI)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할 수 있을까.
- 이런 기술들이 우리나라에서 개발이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요. 기업들 반응은 어떻던가요?
“포럼을 열 때마다 기업 신사업부나 연구소 임직원들이 적극 관심을 보이더군요. 이 10개 질문은 일종의 예시라고 보면 되고요. 각자의 환경에 맞는 도전적 질문들을 적극 발굴하는 노하우를 전파하는 게 목적이에요. 우리 사회 곳곳에 그런 도전적인 질문이 넘쳐나고 해답을 찾기 위한 스케일업, 즉 끈질긴 시행착오의 축적이 이어지길 바라는 거죠.”
▲오너 핑계대는 CEO- 이대로면 중국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4월에 상하이모터쇼를 가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창업 2, 3년 신생업체들이 완성차를 만들어 내놓더라고요. 살짝 고개만 돌려도 배터리, 전장, 강판, 바퀴, 페인트 등이 다종다양하게 널려있으니 가능한 일이에요. 넓고 다양한 생태계에서 실험된 결과들이 사회적으로 축적된 힘인 겁니다..”
- 우리 산업계에 대해선 독한 진단을 많이 하시더군요.
“10년 전보다 훨씬 심각하죠. 정말 20년째 예전에 쟁여둔 냉장고 음식만 꺼내 먹고 있는 형국이에요. 이대로면 곧 텅텅 비겠죠. 우리나라 산업 포트폴리오가 20년 넘게 전혀 바뀌지 않고 있는 게 강력한 증거예요.”
-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함이 필요할 텐데요.
“우리 산업계에는 그런 절박함이 안 보여요. 내놓는 처방이 더 빠른 벤치마킹이에요. 새로운 도전은 없이 기존에 해오던 걸 더 강력하게 쓰려고 하는 거죠. 앞으로는 중국이 만든 설계도를 받아서 흉내 내고 모방하며 먹고 살겠다는 걸까요? 그래서는 한국의 성장이 정점에 왔다는 ‘피크 코리아’를 걱정하는 겁니다.”
- 뭐가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까요.
“리더십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고 교과서와 달라서 불안하더라도 새로운 걸 한번 해보자고 질문을 던지고 목표를 제시해야 됩니다. 단기 성과를 기대해선 안 돼요. 숱한 시행착오 과정을 인내심을 가지고 버텨야 합니다. 리더십이 기다려주지 않으면 구성원들은 절대 해낼 수가 없어요. 국가 연구개발 사업 성공률이 왜 그렇게 높은지 아세요? 실무자들이 실패하면 안 되니까 질문 자체도 도전적으로 하지 않는 겁니다.”
- 오너가 제일 중요하겠군요.
“그렇긴 한데요. 고용된 최고경영자(CEO)도 오너 핑계를 대고 행사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적절히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무리한 도전을 하지 않는 거죠.”
▲신산업 열어가는 기업가형 국가- 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요.
“정부가 한 해 재정으로 쓰는 돈이 670조 원가량입니다. 그중 물건을 사는 데 들어가는 돈이 200조 원가량이에요. 대한민국에 이 정도의 막강한 바잉 파워(구매력)를 가진 집단은 없죠. 정부가 어떤 물건을 사느냐에 따라 산업계 방향이 확 달라질 수 있어요. 그 돈의 일부라도 단순히 최저가 입찰이 아니라 혁신성을 전제로 쓰자는 겁니다.”
- 윤석열 정부는 재정 지원은커녕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했었죠.
“당시 학교에서 해고된 포닥(박사후연구원)이 많죠. 예산을 1년 만에 복원했다지만 한번 잘리면 돌아올 수가 없어요. 게다가 의대 정원을 한꺼번에 1,500명 늘렸어요. 쉽게 말해 공대에 올 학생 1,500명을 고스란히 의대로 옮긴 겁니다. ”
- 쉽게 복원이 안 되는 건가요?
“총량보다 중요한 게 꾸준함이에요. 물건을 생산할 때는 전원을 껐다가 2년 뒤에 전원을 다시 넣으면 바로 생산이 되잖아요. 연구개발은 전원을 차단하면 축적된 게 사라지기 때문에 전부 다시 시작해야 되는 거예요. 향후 20년, 30년 악영향을 줄 고약한 일을 한 겁니다.”
- 금융도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강하게 비판하시던데요.
“원래 산업의 도전성은 금융이 뒷받침을 해줘야 하거든요. 그래야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스케일업 과정을 버텨낼 수가 있죠. 그게 금융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금융이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도대체 한국에서 금융이 무슨 역할을 했길래 1년에 수십 조 순익을 냅니까. 그러면서 규제산업 운운하더군요. CEO들은 오너 핑계, 금융기관들은 금융당국 핑계만 대는 거죠.”
▲어린 과학기술 인재 손잡는 대통령- 과학기술자 존중을 위해 대선 후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과학기술이 중요하다 정도라도 얘기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대통령이 과학기술자에 대해 사회적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하면 장·차관들이 움직이거든요. 관련 행사 한 번 갈 거 두세 번 가고, 10명 만날 거 100명 만나죠. 제도 개선도 적극 나섭니다. 대통령이 어린 과학기술 인재를 더 만나주고 격려해주고, 이런 모습이 많이 노출되면 사회 분위기가 바뀔 겁니다.”
- 해외 이공계 인재 유입도 필요할 텐데요.
“맞아요. 동남아 국가에 똑똑한 인재가 많습니다. 한국에 가면 대접을 잘 해준다더라는 얘기들이 퍼질 수 있도록 해야 돼요. 그들을 끌어들이고 붙잡을 수 있는 매력적인 유인을 국가가 제공해야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인재 유입은커녕 유출을 걱정해야 하죠.”
- 연구 지원은 어떤가요.
“무엇보다 기초연구, 국가미션연구 등 당장은 돈이 되지 않지만 긴 안목으로 국익을 높일 수 있는 연구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돼요. 자타 공인 선진국이라고 한다면 기후환경, 해양 등 글로벌 문제에 대한 연구에 돈을 써야 합니다. 먹고 살만하니까 남 도와주자 이런 도덕적인 얘기가 아니고요. 미국이나 유럽이 그런 문제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해답을 찾으면서 남들이 쫓아오지 못할 기술의 씨앗을 찾는 겁니다. 국격을 높이는데 K컬처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봅니다.”
-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AI 육성을 말하는데요. 어떤 게 필요할까요.
“AI 개발 인력만 키워서 될 게 아닙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수요자들의 AI 감수성을 키우는 일이에요. 기업 등 수요자들에게 어떤 AI 수요가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또한 추격이 아니라 ‘그랜드 퀘스트’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래야만 남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의 AI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 마지막으로 여쭐게요. 그래서 한국은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 곳곳에 ‘최초의 질문’이 있고, 그걸 보고 미래세대가 흥분해 도전하고, 국가가 이를 뒷받침하면서 실패해도 괜찮다고 등 두드려주는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 시끌벅적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면 충분히 희망적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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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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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떻게 하느냐에따라 성공도 실패도 하지만 실패를 무서워 한다면 결국은 제자리 걸음 결국엔 뒷걸음 으로 망 할수도 있다 할수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