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밋 틸(왼쪽)과 어머니 메이미 틸.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제공]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전 경찰관 데릭 쇼빈이 2021년 6월 25일 열린 재판에서 2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직후 시위대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아이를 헛간으로 끌고 가 마구 두들겨팼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그들은 말했지만,
난 그게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그들은 아이를 고문했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짓을 아이에게 했어.
헛간에선 비명소리 들렸고 바깥 거리에선
사람들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가수이자 시인인 밥 딜런은 1962년 발표한 곡‘에밋 틸의 죽음’에서 7년 전 억울하게 살해당한 한 흑인 소년의 이야기를 읊조렸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죽음조차 유희거리로 여겼던 잔인한 시대에 대한 폭로였다. 무거운 기타 선율도 비명인 듯 처절하다.
밥 딜런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소년의 죽음은 1950~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에 도화선이 됐고,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년은 여전히 그 불길 속에 살아 있다. 끝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기에, 그래서 아직은 매듭지을 수 없는 미제 아닌 미제 사건으로 남아, ‘지체된 정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해 여름 강에서 시신이 떠올랐다
1955년 8월 어느 뜨겁던 여름 날, 미국 일리노이주(州) 시카고에 살던 열네 살 소년 에밋 틸은 미시시피주 머니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사촌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첫 여행길. 엄마 메이미 틸은 만류했지만, 에밋은 마냥 들 떠 있었다. 남부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알기엔 아직 어렸다.
24일 에밋은 사촌들과 어울려 면화를 딴 뒤 머니 시내 식료품점에 들렀다. 20대 백인 부부 로이 브라이언트와 캐럴린 브라이언트가 운영하던 곳이었다. 풍선껌을 고른 에밋은 무심코 돈을 계산대가 아닌 캐럴린 손에 건넸다. 장난스럽게 휘파람도 흥얼거렸다. “흑인 주제에 감히…” 당시 남부 백인들로선 상상도 못할 모욕이었다.
28일 새벽 잠을 자고 있던 에밋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캐럴린의 남편 로이와 의붓형제 마일럼에게 납치돼 끌려갔다. 그리고 사흘 뒤인 31일 인근 강가에서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머리는 총에 맞아 뼈가 완전히 부서졌고, 얼굴은 한쪽 눈이 뽑힌 채 으깨져 있었다. 조면기(면화에서 솜과 씨를 분리하는 기계)에 묶여 있던 몸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돼 알아보기 힘들었다. 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로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신은 고향 시카고로 운구됐다. 엄마 메이미는 울부짖으며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이 알아야 한다.” 장례 기간 관 뚜껑을 열어 놓고 아들의 얼굴을 공개했다. 시신을 촬영한 사진이 잡지에 실리면서 사건은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나흘간 10만 명이 조문했고, 어린 소년이 겪었을 끔찍한 공포에 몸서리쳤다.
로이와 마일럼은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으나 끝까지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캐럴린은 법정에서 에밋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변호인은 “에밋이 시카고 어딘가에 숨어 있으며 흑인 인권 단체인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가 다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놓고 사건을 조작한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에밋의 사촌들을 비롯해 흑인 목격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에 나섰지만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법은 결코 정의롭지 않았다. 전원 백인으로 꾸려진 배심원은 두 용의자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심지어 납치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음에도, 대배심은 이들을 납치 혐의로도 기소하지 않았다. 그렇게 죄를 벗은 두 사람은 이듬해 돈을 받고 응한 잡지사 인터뷰에서 태연하게 범행을 시인했다. 살인 행각을 마치 무용담처럼 묘사하기까지 했다.
■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흑인 사회가 들끓었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인종차별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남부 흑인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뜬 북부 도시계층 흑인들도 연대했다. 흑인 인권ㆍ시민권 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현대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로자 파크스의 삶에도 에밋이 있었다. 에밋이 살해당한 그해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살고 있던 파크스는 버스 좌석을 백인 승객에게 양보하고 뒤편 흑인 전용석으로 옮기라는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했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그는 훗날 “에밋이 떠올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버스 보이콧 운동’이 불붙었다. 곧이어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동참했고, 보이콧 운동은 앨래배마주 다른 도시와 플로리다주 등 남부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결국 1956년 연방 대법원은 몽고메리의 흑백 분리 버스 탑승 제도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작지만 소중한 승리였다.
흑인 시민권 운동이 조직화된 것도 이 즈음이다. 1957년 아칸소주 리틀록센트럴고등학교에서 흑백 통합 교육을 거부한 학교 당국에 저항한 흑인 학생들의 투쟁, 1965년 흑인 참정권을 요구한 앨라배마주 ‘셀마 행진’ 등 대규모 투쟁이 잇따랐다. 그래서 1950~6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흑인들은 스스로 ‘에밋 틸 세대’라고 정의한다.
흑인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한 ‘전설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도 이렇게 말했다. “에밋 틸 사건이 나 자신 또는 내 형제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들을 잃은 엄마 메이미도 인권 운동에 투신, 2003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또 다른 에밋’을 위해 평생토록 싸웠다.
에밋이 숨지고 9년 뒤인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이 제정돼 마침내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철폐됐다. 노예해방 99년 만이었다. 이듬해에는 흑인 투표권법도 만들어졌다.
에밋의 정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2020년 백인 경찰관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를 기리는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ㆍ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캠페인 당시, 시위대는 플로이드와 에밋의 이름을 함께 외쳤다. 이제 에밋은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열망과 인간 존엄을 위해 싸운 이들을 기리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1년 초에는 미국 의회에서 ‘에밋 틸 린치 금지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법은 사적 제재를 증오 범죄로 간주, 최고 종신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사건 당시 아홉 살이었던 바비 러시 하원의원이 발의했다. 그는 “어릴 적 잡지에서 본 에밋의 모습이 흑인으로서 내 의식을 형성했다”며 “그 사건을 알지 못했다면 내 인생 행로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 수차례 재수사에도 결국 영구 미제로
에밋의 죽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수차례 재조사에도 불구, 어느 누구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두 용의자 외에 다른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에밋의 시신을 발굴해 부검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탓에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두 용의자도 수년 전 사망한 터라, 새로운 진술을 확보할 수도 없었다. 이미 한참 지나버린 공소시효도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듯했던 사건은 2017년 ‘에밋 틸의 피’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에밋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캐럴린이 “거짓 증언을 했다”고 실토했다는 내용이 책에 실린 것이다. 듀크대 연구원이자 역사가인 저자 티머시 타이슨은 캐럴린이 2009년 인터뷰에서 “소년의 행동은 그에게 일어난 일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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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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