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57) 도산과 파차파 캠프

리버사이드의 최초 코리아타운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 The First Koreatown in the United States’ 전시회에 실제 크기로 전시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습. 도산은 1905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 오렌지과수원 농장으로 이동해서 미국 최초 코리아타운 파처파 캠프에서 한국인 노동조합을 세워서 한인들 일자리를 갖고 정착하게 도움을 주었다. [Courtesy of Korean Heritage Library, USC Libraries,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Hyungwon Kang]
1902년에 한국인 부부(夫婦) 미국이민 1호로 대한제국 고종황제 발행 여권을 가지고 도산 안창호 선생과 부인 이혜련 여사가 인천에서 하와이, 하와이에서 시애틀,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여러 항을 거쳐 어렵사리 미국을 입국했다.
20세기 대한민국 역사에 남는 주요 인물 중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가장 으뜸가는 지도자의 한분으로 꼽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렌지과수원 농장에서 과일을 수확하는 노동자로 이민생활을 시작해서 미국 태생 2세 아들 안필립의 이름이 할리옷 명성의 거리에 별로 새겨진,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집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더 많고도 훌륭한 업적들을 남겼다.
성공한 이민자 가정의 가장이면서, 대한민국 헌법 초안을 집필했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미주 한인들의 성금으로 세웠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에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인 사실들이 LA에서 50마일 떨어진 리버사이드에서 확인됐다.
2018년에 리버사이드에서 타계한 바이올렛 캐서린 김(1922-2018) 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유물에서 그동안 기록에서나 알려졌던 ‘미국 최초의 코리아타운’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가 추가로 확인됐다는 UC 리버사이드 연구팀의 연구가 공개됐다.
1900년도 초기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지역 중에는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있는 끝이 안 보이는 넓은 오렌지 과수원 농장이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포장해서 전국으로 수출하던 캘리포니아 오렌지는 이민 노동자들에게는 꿈같은 취업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남자 노동자들이 과수원에서 오렌지를 딸 때 여성들은 실내에서 오렌지를 포장 할 수 있는 취업의 기회도 있었다. 타 지역에서는 독신자 총각들 위주로 한인 이주 노동자들이 살고 있었다면, 파차파 캠프에서는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모여서 일하며 살았다.
하와이에 1903년 1월13일 도착한 102명의 대한제국의 미주 첫 집단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한국 이민 노동자들의 인구는 1905년에 와서는 이미 7,000여 명이 넘었다. 하와이의 열약한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일부 미주 한인들은 바로 미국 본토, 또 기회가 좋다는 말에 속아서 멕시코 캐리비안해 연안의 멕시코 유카탄 반도 선인장 농장으로 진출했다. 일부는 쿠바섬으로 추가로 그 당시에 알던 세상 끝까지 이동해갔다.
미국 유학의 꿈을 꾸고 왔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하와이에서 배를 잘못 타서 캐나다 벤쿠버로, 밴쿠버에서 시애틀로,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부인과 함께 빈털털이로 미국에 입국했다. 안창호 선생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오면서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하와이산을 보고 섬산, 즉 도산(島山)이라고 호를 정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의 청나라 화교들 구역인 차이나타운 주변에서 반아시안 정서 속에서 어렵게 살던 한국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우리 동포 교육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1904년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설립하면서 공립신보(共立新報) 신문을 통해 한인 이민자들에게 민족적인 정체성과 독립운동을 교육시켰다.
1905년부터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자리를 찾아 리버사이드 오렌지과수원 농장으로 이동해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인들을 교육했다. 미국 최초 코리아타운 파차파 캠프에서 한인노동국을 세워서 한인들이 일자리를 갖고 정착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1905년 을사년(乙巳年)부터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인해서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 없는 설움을 벗어나려는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리버사이드에서 살고 있을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7년 잠시 한국에 들려서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항일 비밀 결사 단체 신민회(新民會)를 세웠다.
1909년 한인 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 하나로 통합되면서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 대신 한국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North America)가 생겼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모은 미주 동포들의 독립자금으로 이승만 박사도 동 시기에 안중근 의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
도산은 1860년에 청나라가 러시아에게 조선의 참여 없이 불법으로 건네준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외만주) 지역의 한국인들 방문을 비롯해서, 시베리아, 영국, 뉴욕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돌아와서 이민자의 가정생활을 계속 했다. 1917년에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 섬유원자재를 채취하는 에네켄 농장 한인 노동자들을 방문해서 수개월동안 같이 생활한 경험도 있다.
파차파 캠프에서 모인 1911년 대한인국민회 3차 북미총회에서 21개 결의안을 통과하면서 미국 사회의 민주공화국 정치사상인 삼권분립에 근거해 중앙총회 무형정부를 세웠고, 법안을 만드는 대의회를 설립해 대의원 제도를 확립했으며, 자치 규정을 만들어 법제도를 확립하여 조직적으로 미주 한인들의 행동 지침을 정의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 미주 한인들의 자발적인 기금으로 세운 상해 임시정부가 1919년에 들어설 때까지 대한인국민회가 사실상 우리 미주 한인을 대표하는 정부의 역할을 했다고 LA 1368 W Jefferson Blvd.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총회 기념관에 기록돼 있다.
상해 임시정부 헌법을 보면 수천년간 대를 이어 왕권 하에서 살아온 민족답지 않게 미국 헌법에 있는 민주공화국 문구들이 들어 있다. (오른쪽 표)
이러한 민주주의 정치사상은 1948년 7월 대한민국 헌법에 고스란히 수록된다. 오늘날 세계에서 미국, 프랑스, 다음으로 피를 흘려서 어렵게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완성해 낸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 헌법의 씨앗을 심은 건국의 아버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은 미주 한인들의 성금으로 리버사이드시 중앙(Riverside Pedestrian Mall, 3750 Main Street Riverside, California)에 세워져 있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민주공화제 헌법의 배경이 된 파차파 캠프 원래 위치는 리버사이드시 역사유적 제1호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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