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여래사는 1980년 10월 개원과 동시에 북가주 한인불교의 중심이 됐다. 여래사보다 먼저 북가주에 둥지를 튼 카멜 삼보사가 있기는 했지만 북가주 한인사회 중심지로부터 꽤 먼 곳에 자리한 탓에 웬만한 불자들에게는 ‘어쩌다 한번 찾는 부처님 도량’ 이상이 되기 힘들었다.
게다가 여래사에는 설조 스님이 있었다. 남다른 기획력 추진력 조직관리능력 등으로 일찍부터 대한불교조계종의 주목받는 소장파였던 그는 10.27 법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LA로 피신해 있던 중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 전법활동을 하라는 구산 스님의 당부를 받들어 셋집사찰 SF여래사를 시작했다. 창건주 겸 초대주지 설조 스님과 신도들의 원력이 시너지 효과를 발하면서 여래사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몇 년 안가 랜돌프가에 독립사찰로 거듭났고 새크라멘토 분원과 레익타호 가는 길에 선원까지 두게 됐다. 설조 스님이 1990년대 들어 개혁의회 수석부의장, 불국사 주지, 총무원장 출마 등으로 한국에 장기간 머무는 동안에도 SF여래사는 1991년 부임해 근 20년 주지 소님을 맡은 수원 스님을 중심으로 착실한 성장을 거듭, 2008년 여름에는 샌브루노 소재 현재의 장소로 확장이전했다(사진).
북가주 한인불교의 중심이라는 SF여래사의 지위는 그러나 2010년경 수원 스님이 귀국한 뒤부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수원 스님처럼 장기간은 아니더라도 일정기간 안정적으로 주지 소임을 맡을 스님을 구하지 못해 생긴 균열 내지 불안정이었다. 당장 수원 스님의 뒤를 이은 소원 스님의 경우 동호 스님이란 법명으로 UC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설조 스님의 당부를 받아들여 소원이란 새 법명을 받고 여래사 주지를 맡았으나 2,3년을 넘기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그나마 매우 긴 것이었다. 소원 스님 이후에는 주지 공석과 주로 3개월짜리 주지대행 체제가 반복됐다. 2018년 11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소원 스님 이후 가장 오래 주지를 맡은 광전 스님이 귀국한 뒤 꽤 오랫동안 여래사는 주지 없는 절이 됐다. 일련의 상황은 설조 스님이 주로 한국에 머물면서 종단정화투쟁 등을 주도하느라 여래사 이모저모에 예전만큼 신경을 쓰지 못한 데서도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7월 중순, 대청 스님이 왔다. 고운사 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고 다년간 토굴수행 경험도 있는 대청 스님은 광전 스님에 이어 두 번째로 설조 스님 상좌들의 돌림자인 ‘원’자 돌림 아닌 스님이었지만, 설조 스님의 간청을 받아들여 여래사에 오게 됐다고 한다. 기자는 전화로 메일로 수차례 대청 스님에게 인터뷰를 청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던 중 최근 대청 스님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대신 설조 스님의 막내상좌인 승원 스님이 왔다.
승원 스님은 과거 두차례 약 3개월씩 주지대행을 맡으면서 연로한 신도들을 부모 모시듯 공손하고 친절하게 대해 신도들 사이에 수원 스님처럼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하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 그러나 승원 스님의 여래사 체류는 그리 길 것 같지 않다. 얼마나 머물 것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승원 스님은 “동안거 일정 때문에 많은 시간을 못내었다”고 에둘러 답했다. 여러 불자들은 여래사가 주지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고 중심사찰 역할을 다시금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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