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가슴 벅찬 감동이, 때론 말 못할 슬픔과 절망, 고단함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 특히 낯설고 물 선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 한인들에게는 결이 다른 스토리들이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내장돼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속, 이제는 잔잔한 강물처럼 침잠됐을 워싱턴 지역 한인들의 초기 이민생활의 애환과 남다른 사연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1999년 여름, 남편의 직장 발령에 따라 한 두 해 있다 곧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뉴욕 JFK 공항을 거쳐 볼티모어에 온 것이 그리 멀지않은 기억이다.
미국생활의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곧 시작한 대학원은 두 살된 호기심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을 데리고 시작하기에는 그리 녹록치 않은 일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 직장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남편에게 기댈 수도 없었는데다가 교육대학원이라 수업이 전부 오후 4시 지나 있어서 아이를 맡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고, 미국와서 배운 서툰 운전으로 학교를 오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산 너머 산이 된 것이다.
그 해에 아버지가 마침 40여년 다니신 직장에서 은퇴하시게 되어 용기를 내어 6개월만 오셔달라는 SOS를 보냈다. 열심히 일만 하시느라 그동안 미뤄왔던 여행도 다니시고 즐기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마다하시고 맏딸의 구조 요청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손자를 봐 주시러 오셨다.
드디어 첫 수업날이 되었고 아버지가 운전해 주시는 차로 세 식구가 학교로 향했다. 오리엔테이션은 금방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3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수업시간 내내 강의 내용은 뒷전이었고 바깥에서 언제 나올지 모를 딸을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와 아들 생각에 안절부절 못했다. 어둑어둑한 밤 가로등 아래에서 저녁도 못드시고 손자를 보고 계신 아버지께 허겁지겁 달려가니, 힘든 기색이 역력하신데도, “첫 수업 잘 하고 왔느냐”고 오히려 딸을 걱정하시며 손자를 등에 업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문득문득 떠올라 눈물이 차오르게 한다.
이렇게 운전 못하는 딸과 영어가 낯선 아버지는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본의 아닌 스테이 홈(stay home)생활을 하게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외출제한령(stay-home order)으로 어디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게 되면서 매일 1시간씩이라도 동네를 걸을 때마다 20년 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운동하고 오셨던 아버지 모습이 오버랩 된다.
아무도 모르는 미국에 오셔서 오로지 손자만 보시며 6개월을 버텨주신 덕분에 딸은 대학원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2002년 봄에 드디어 졸업하면서 한국에 계신 아버지께 전화 드리니 대견해 하시며 “잘했다”라는 그 한마디가 아버지께서 건강하실 때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
황태윤 (MD 성김안드레아 한국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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