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고등학생 마리아가 진찰실로 들어 왔다. 의례 하는 여름 잘 지내고 있느냐로 시작해 특별한 문제는 없느냐 묻자 아무 문제가 없다며 웃는다. 머리, 목, 가슴을 진찰 하며 Period 는? 하자 두달 전이라 하더니 자기는 불규칙해서 한두달 건너는 건 예사라 한다.
남자 친구는? 없는데요. 마리아의 배에 손을 댄 내 손이 흠칫하고 가슴이 철렁 한다. 배에 혹?, 얼른 기록을 보니 육개월 전 목이 아프다고 왔었는데, 그때에는 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피 검사, 소변 검사 하는 겸에 임신 검사도 했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날 방 밖으로 불렀다. “She is very pregnant” 엄마는 남동생과 대기실에 있어요. 데려 올까요? 한다.
엄마와 딸 둘이서만 얘기 하도록 해주고 다음 환자를 보고 있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모녀가 울며불며 털어놓은 얘기는 날 아찔하게 했다. 의붓아버지가 그녀가 열 서너 살 때부터 그녀에게 성행위를 해왔다는 고백이었다. 그 동네 공장에서 일 하는 의붓 아버지와 마리아의 엄마 사이에는 여섯 살 난 아들도 있다.
울고 있는 엄마에게 경찰과 아동보호기관에 보고해야 하는 내 의무와 절차를 알리고 산부인과에 연락을 한다. 산부인과의 회답은 임신 사개월. 그동안 입덧도 했을 거고 배도 꽤 부른데 어떻게 엄마가 몰랐을까. 하지만 엄마도 일을 하고 늦게 저녁을 먹을 때나 서로 얼굴을 보며 사는 그들의 생활, 배를 감추는 건 아직까지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아동복지요원의 보고가 왔다. 아버지가 자기 행동을 순순히 인정은 하면서도 자기는 항상 콘돔을 썼기 때문에 애 아버지는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는 거였다. 기가 막혀 웃을 수도 없었다. 엄마는 그날 저녁 아이들을 데리고 호텔로 나와서 이혼을 요구 했다는 거다.
마리아의 임신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엉망이 된 그 날은 내 모든 환자 가족에게 나의 은퇴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다음 날이었다. “환자 복 많더니 막판에까지 이런 폭탄을 우리에게 안겨 주어야 합니까?” 하며 나와 이십년을 함께 일한 간호사의 섭섭함이 섞인 불평을 뒤로 하고 난 은퇴를 했다.
얼마 후 간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리아 기억 하시죠? 물론! “ 마리아가 아이를 낳았고, 잘 살고 있답니다. 물론 의붓아버지는 빼고요. 사실은 마리아에게 엄마가 싫어하는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와의 사이에 임신이 알려지면 엄마가 그녀를 집에서 내쫓을 거 같아서 그 사실을 감추려다가 그보다 더 거창한 첫 번째 비밀이 터졌던 거예요.” 이제 마리아의 엄마가 아들, 딸, 딸의 남자 친구 그리고 손자까지 모두 데리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
김경희/ 소아과전문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