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14
▶ ■‘한국의 007’김상근의 망명

1970년대 코리아게이트 당시 주미대사관으로 사용됐던 현 워싱턴 총영사관 건물. 1949년 10만 달러에 구입한 후 1992년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대사관으로 사용됐다(왼쪽). 하원 윤리위에서 일하던 당시 필자의 모습(오른쪽).
-김상근, 대사관서 동포 담당
1976년 11월, 워싱턴 포스트에는 KCIA 요원 김상근 참사관의 미 망명 기사가 실렸다. 한 달 전인 10월24일, 이 신문이 코리아 게이트 사건을 처음 보도하며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아 뒤숭숭하던 그 시점에 주미대사관의 중정 요원이 미국 망명을 결행한 것이다.
WP는 그의 망명으로 미 법무부와 FBI가 기쁨에 차 있다고 보도했다. 막연하기만 하던 코리아게이트 수사에 서광이 비친 것이다. 반면에 한국 정부로서는 산 넘어 산이었다.
WP는 후속 보도에서 김상근을 ‘KCIA의 007 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 보도를 보며 나는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는 구면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주미대사관 중정 팀에서 교포 담당이었다. 그래서 한인들과 접촉이 많았다.
그를 처음 만난 건 DC 매사추세츠 애비뉴에 있던 김동조 대사관저에서 열린 어느 국경일 파티에서였다. 미 정부 인사, 외교관들은 물론 동포들까지 붐비던 그 파티에서 만난 김상근은 예의 바르고 점잖고 조용조용하게 처신하던 인물이었다.
-화장실에도 보안관들이
그를 다시 만난 건 1977년 10월 청문회를 앞두고서였다. 청문회에 출두하기 전에 질문과 답변 내용을 조율하기 위해 의회의 우리 사무실을 몇 번 찾았던 것이다. 나를 본 그는 아는 척을 하며 반겼다. “안 선생. 참 반갑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망명생활 1년 가까이 그가 접한 한국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서울 법대를 나와 변호사 생활을 하다 도미한 강원길로 당시 FBI 분석관으로 있었다. 강이 망명한 김상근을 담당한 것이다.
미 당국의 보호 속에 지내다 안면이 있는 같은 동포를 만나니 김상근으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11월26일 망명 후 그는 철저히 미 법무부 보안관실(Marshal’s Office)의 신변 보호 속에 지내야 했다. 그는 ‘연방 증인 보호조치’의 대상자였다. 외국 스파이와 망명객, 법정 증언을 하는 조직범죄단의 일원의 신변 보호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대상자가 되면 이름도 바꾸고, 사는 곳도 비밀에 붙이고 과거의 모든 경력은 말소된다. 한 사람의 정체가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거듭 나는 것이다.
그래서 김상근이 우리 사무실에 올 때마다 건장한 법무부 보안관들이 따라 다녔다. 그가 화장실에 간다하면 보안관들이 미리 화장실에 가서 검색을 했다. 혹시라도 모를 위해에 대비하는 것이다. 한번은 김이 내게 물었다.
“제가 가장 괴로운 게 뭔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제가 못하게 말리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줄 방법이 없어 괴롭습니다.”
과거의 모든 인연과 절연해야 하는 건 비단 그뿐이 아니라 그의 자식을 포함한 가족들도 해당된 것이다.
-후배가 KCIA 끄나풀
그의 입술은 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에서는 조국과 결별해야만 했던 망명객의 고뇌와 고단함이 묻어났다.
“안 선생. 한국에서 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그의 물음에는 그의 절절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한국 신문을 모아서 갖다 주었다.
중정의 촉망받는 엘리트로 있다 졸지에 망명객 신세가 된 그에게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후회가 내내 교차했다. 부유하는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아가야 하는 망명객의 자화상이었다.
그는 내게 ‘참회’의 고백도 했다.
“안 선생. 참 미안합니다… 3선 개헌 반대할 때 첩자를 넣었습니다. 그게 안 선생의 후배인 오00입니다.”
1969년 박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워싱턴 한인들이 투쟁위를 결성해 시위를 할 때 내부에 ‘스파이’를 투입했다는 말이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몇 해 전 대사관저에서 파티를 하는데 그 오 모씨가 훈장을 받은 것이다. 모두가 뜨악해 한 것은 그가 특별히 상을 받을 공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 후배가 KCIA의 끄나풀인 걸 눈치 챘다.
-대사관 비밀대책회의
김상근은 자신이 망명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내게 설명해주었다.
“76년 10월 이전부터 미 법무부와 FBI의 촉수가 점점 다가오는 걸 느꼈습니다.”
이미 그는 코리아게이트와 관련된 미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대사관에서의 호출이었다.
“하루는 불려갔더니 김영환 공사가 내게 막 야단을 쳤다. 왜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함병춘 대사와 자신, 그리고 서울에서 온 유혁인 정무 1수석이 모여 비밀 대책회의를 한 내용을 말해주었다. 함 대사가 이번 문제를 양두원 중정 차장보와 김상근 선에서 매듭짓겠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 공사도 신직수 중정부장에게 양두원과 내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보고했다며 나보고 서울에 가서 1년 정도 감옥에 갔다 나오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억울했다. 나는 상관의 지시로 일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그들의 처사에 배신감을 입속으로 삼켜야 했다. 김규진이 본명인 김상근은 서울대 중문과와 대학원을 나와 1961년 중정에 입사한 후 연구 직에 있다 66년-67년 김형욱 부장 비서실 근무를 거쳐 1970년 주미대사관으로 파견됐다. 처음에는 1등서기관이었지만 76년 3월 참사관으로 승진했다. 6년 근무는 그가 그만큼 우수 엘리트 요원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김형욱 찾아가 망명 도움 요청
얼마 뒤 본부로부터 소환장이 날아왔다. 그는 서울로 돌아갈 마음에 부인과 냉장고도 사고 짐을 쌀 준비를 했다한다.
그런데 뉴욕 출장 중에 그는 마음을 돌이켰다. 어떤 한인으로부터 “오늘 뉴욕타임스에 양두원이가 파면됐다는 뉴스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상호란 가명으로 주미대사관 공사를 지낸 양두원 차장보는 그가 유일하게 믿고 있던 상사였다. 양의 파면 소식에 놀란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워싱턴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서울에 보고서를 쓰기 위해 밤중에 대사관의 통신요원을 불렀다. 그보다 한참 하급 직원이었다. 그런데 그의 지시를 받은 통신요원의 태도가 불량했다. 네 맘대로 하라는 식이었다. 통신요원은 서울 본부와 대사관 사이의 비밀 통신을 담당했다. 김상근은 그의 돌변한 태도를 보고 “내가 모르는 내용을 그가 알고 있구나”하고 직감했다.
서울에 가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자 다음 날 그는 뉴저지에 은신 중이던 김형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망명을 단행한 것이다.
나는 그가 털어놓은 내밀한 고충을 들으며 씁쓰레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라를 위해 일했지만 그의 길은 그의 의지 밖에 있었다. 그에게는 이제 미 의회 청문회에서의 곤혹스런 증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설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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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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