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13
▶ ■ 이근팔과 류재신, 이봉양의 박동선 증언

(오른쪽)김동조 주미대사의 비서였다가 김대중 대통령 워싱턴 망명 당시 비서실장을 지낸 이근팔 씨. (왼쪽)이봉양이 김용환 정보공사와의 통화내용을 메모해 상사인 로빈스에게 보낸 서류를 찢어버렸는데 하원 윤리위 조사관들이 박동선의 사무실 앞 쓰레기통을 뒤져 절단한 메모지를 복원했다. 청문회 증거물로 채택된 복원된 메모지다.
-조사팀, 박의 운전사고 기록까지 뒤져
박동선(朴東宣), 이제 그의 차례였다.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그는 1935년 평남 순천 생으로 배재중학을 다니다 16살이던 1952년 도미했다. 시애틀의 에디슨하이스쿨, 조지타운대학을 마친 그는 1962년 워싱턴 DC에 조지타운클럽이란 사교클럽을 세웠다.
확실히 그는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학생회장을 지냈으며 졸업 3년 만에 조지타운클럽을 만들어 워싱턴 사교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가 미국의 대한 쌀 수출 중개권을 통해 얻은 수익 일부를 미 의원들에게 뿌렸다는 의회 로비 활동을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 지가 폭로하면서 그는 한국과 미국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청문회장의 의원들은 박동선과 한국 정부의 밀착된 공식관계를 확인하려는데 역점을 두었다.
윤리위 수사팀의 정보 분석 담당 셰릴 홈스는 박동선의 은행 거래내역을 심사, 분석해 박이 미국의 2개의 미곡 수출회사로부터 받은 중개료 수익이 총 900만 달러에 이르며, 미국 내 8개 은행과 버뮤다 은행계좌에 입금된 사실을 증언했다. 윤리위는 증언에 첨부된 거래 수표를 포함한 수십 건의 회계기록 사본을 증거로 채택했다. 홈스는 미국의 수사권이 못 미치는 한국, 영국 등 외국에서의 은행 거래에는 손을 못 썼다고 증언했다.
하원 윤리위원회 조사팀은 박동선의 미국 내 기록도 샅샅이 뒤졌다. 그 중에는 이런 기록까지 찾아냈다. 박동선은 젊은 시절 테네시 주의 브리스톨 소재 킹 카렛지에 유학했고, 타인의 자동차를 주인 허락 없이 운전하다 사고를 냈다. 수사 당국은 박동선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처벌을 받든가, 미국을 떠나라고. 박동선은 귀국을 택했다.
-대사관서 박은 기피인물
주미대사관의 외교관이었던 이근팔과 박동선의 측근이었던 류재신, 이봉양 등 3명의 증인은 그와 한국정부의 관계에 대해 증언했다.
김동조 대사 시절 비서와 총무과장을 지낸 이근팔은 그가 목격한 박동선과 KCIA의 유착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했다.
“박동선이 대사관에 나타났는데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타고 왔다. 그는 2층의 대사실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다. 늘 바로 정보공사실로 들어갔다.”
당시 그는 각종 대사관 행사에 초청받지 못하는 등 기피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중앙정보부 공사실에서 그의 ‘업무’를 보고 돌아가곤 했다.
이근팔(李根八)은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1970년 외교관 생활을 그만 두고 워싱턴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 1972년 김대중의 미국 체재 중 그의 처남인 이성호 전 워싱턴한인회장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80년대 김대중의 망명생활 당시에는 그의 비서실장 역을 맡기도 했다.
류재신은 박동선의 조지타운대 외교학과 동창이었다. 그는 박의 주선으로 상하원 의원실에서 인턴십을 마치고 박동선의 ‘태평양개발주식회사(Pacific Developement)’ 회사의 부사장으로 영입돼 일종의 보좌관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류재신은 미국의 법원에서 면책특권을 받고 청문회에 출두했다.
그가 박동선으로부터 받은 첫 임무는 김대중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그해 4월에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1년 2월 당시 DJ는 워싱턴 DC의 메이플라워 호텔에 체류하고 있었다.
류재신에 내려진 박의 특명은 “DJ가 쌀 커미션에 대해 폭로하려 한다. 그것을 막아라”는 것이었다. 류는 김대중 가족과 평소 잘 아는 사이였다.
그는 호텔로 찾아가 김대중을 만났다. DJ는 며칠 뒤 내셔널스 공항에서 귀국했고 류는 환송 인사를 갔다. 그 후 DJ는 박동선의 쌀 커미션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스위스 비밀계좌의 19만불
류재신에는 다시 비밀스러운 임무가 주어졌다. 스위스의 은행에서 19만 달러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 돈은 박종규 경호실장이 박동선의 쌀 중개권을 빼앗은 다음 1년여 동안 받은 커미션의 일부를 비밀계좌에 입금시켜놓은 것이었다.
류재신은 박종규가 관리하던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서 19만 달러를 인출해도 된다는 예금 인출 지시서를 박동선으로부터 건네받아 스위스로 날아갔다. 류는 은행에서 이 서류를 제시하고 19만 달러를 인출해 볼티모어 소재 에퀴터블 트러스트의 박동선의 계좌로 송금했다. 당시 서울의 집 한 채가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19만 달러는 천문학적 돈이었다.
그런데 예금인출서의 서명을 보니 한문으로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류는 증언했다.
“한문으로 Jin(秦)이라 서명이 돼 있었다.”
“그게 누구냐?” “나도 모른다” 류재신은 그 서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다.
내가 그 서명한 한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秦’이 아니라 ‘泰’였다. 비슷하게 생긴 ‘클 태’였던 것이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박종규는 강선태라는 부하에게 중개권 커미션을 맡겨 관리했었다. 류재신이 ‘진’과 ‘태’ 글자를 구분하지 못했을까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엄혹했던 시절엔 때론 ‘거룩한 무지(無知)’의 효용성이 필요하기도 했다.
류재신은 얼마 뒤인 72년 박동선과 갈라섰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박이 처음에 약속했던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였다지만 인간적 배신감이 더 컸다고 한다.
“하루는 박동선의 집에 가서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박의 대미활동 결과 서류가 눈에 띄어 들여다보니 내 직함이 부사장이 아니라 비서로 돼 있었다. 화가 났다.”
류는 그 서류더미에서 박이 미 의원들에게 돈을 줬다는 내용도 봤다고 증언했다. 그는 서류 더미 하나를 훔쳐 나갔다. 나중에 그 서류는 청문회 증거자료로 압수됐다.
-이봉양과 정보부의 텔렉스
박동선이 운영했던 ‘Pacific Developement’에서 근무한 이봉양도 등장했다. 그는 박동선의 형인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직원이었다가 도미한 인물이었다. 당시 박동선은 워싱턴의 조지타운클럽을 한국에서도 열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사전에 이봉양을 미국에 데려와 훈련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봉양은 박과 주미대사관 중정 팀과의 은밀한 ‘거래’에 대해 증언했다.
“한번은 박이 불러 가니 방에 김상근이 있었다. 박이 나보고 얼른 나가라 했다. 다시 가보니 김이 없었다. 아마 김의 노출을 꺼려했던 것 같다.”
김상근은 주미대사관의 중정 요원이었다가 나중에 망명한 인물로 청문회에 서게 된다.
그 후 박동선의 사무실에 텔렉스가 설치됐다. 팩시밀리가 나오기 전이라 문서교환은 이 텔렉스가 담당하던 시절이었다. 박의 송신 상대는 양두원(梁斗源)이었다. 그는 주미대사관에서 이상호라는 가명으로 정보부 공사로 있다 차장보로 승진해 본부에 재직 중이었다.
박은 이봉양에게 텔렉스 업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는 텔렉스 사용법을 몰라 김상근이 와서 가르쳐주었다.
“김상근은 노회한 인물이었다. 박동선에게 직접 텔렉스를 보내라 했는데 내가 맡자 비밀이 노출됐다며 화를 막 냈다.”
한번은 박이 자기의 서류를 보여줬는데 표지에 ‘빙산작전(Ice Mountain Operation)’이라 적혀 있었다. 그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고 한다. 박이 구술하면 이봉양이 타이핑을 해서 텔렉스로 보냈다.
김상근에게 배운 후 이는 텔렉스를 몇 번 보냈다 한다. 미국 의원의 방한계획과 석유수출국기거(OPEC)의 유가 인상 계획 등의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박과 KCIA 사이의 텔렉스는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
-김용환 정보공사의 전화
1976년 여름이었다. 이봉양은 주미대사관 김용환(金龍煥) 공사의 전화를 받았다. 박동선 사건이 미국에서 터져 나오며 한창 시끄러울 때였다.
“오늘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다녀갔는데 박동선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소. 앞으로 박과 대사관의 관계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고 하시오.”
이봉양은 속으로 웃었다. 박동선을 세상이 다 아는데 모른다고 하라니 웃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김 공사와의 전화 내용을 메모해 자신의 회사 상사인 캡틴 로빈스에게 보고했다.
그는 청문회 증언에 앞서 특별한 주문을 했다. 카메라와 녹음기를 청문회장에 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망명한 KCIA 요원 김상근과 손호영도 그 후 이 조치를 요청했다. 증언 내용이 공개될 경우 혹시라도 한국의 후환을 두려워해서였을 것이다. 또 조국을 배반했다는 자괴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개인과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의 부정(否定)과 배신, 우정과 충의가 모래바람처럼 미 의회에 소용돌이치면서 처절함을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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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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