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의 조국 베네수엘라, 정치권은 각성하라” 성명
제자 유혈시위 사망 이후
음악에만 전념 입장 변화
침묵 깨고 정치적 목소리
슈베르트 교향곡 연주회
“희생자에 바친다” 천명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36) LA 필하모닉 음악감독이 혼란이 빠진 조국 베네수엘라를 위해 정치권에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 음악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수년째 정국이 극도로 불안정한 가운데 계속되는 반정부 시위로 유혈사태가 빚어져 최근 5주간 37명이 사망하고 7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00여명이 체포됐다.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부국이었으나 우고 차베스와 니콜라스 마두로 등 두 대통령의 사회주의 지배를 거치면서 성장 기반이 무너진 베네수엘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극심한 경제난에 먹을 것과 의약품 부족으로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지난 수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반정부 운동가들은 두다멜이 조국을 위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줄 것을 요구해왔다. 클래식 음악계의 수퍼 스타요, 전세계 유수 교향악단들이 모셔가고 싶어 하는 지휘자 1순위의 두다멜은 이제껏 베네수엘라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 국내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정치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왔다. 음악에만 전념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입장과 혹시라도 잘못 발언했다가 정부가 지원하는 엘 시스테마(El Sistema)에 불이익이 있을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엘 시스테마는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교육 프로그램으로, 두다멜도 이를 통해 세계적인 지휘자로 부상했다. 이를 벤치마킹한 음악 프로그램들이 세계 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이 운영하고 있는 욜라(YOLA) 역시 엘 시스테마를 본 따 만든 것이다.
그러던 두다멜이 지난 4일 갑자기 입장을 바꿔 성명서를 낸 것은 엘 시스테마 출신의 비올리스트 아르만도 카니살레스(17)가 지난 3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데서 비롯됐다.
조국의 정치 혼란에 대해 침묵하던 구스타보 두다멜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 정권으로 인한 유혈사태의 종식을 촉구했다. [사진 LA Phil]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Enough is enough)며 페이스북에 발표한 두다멜의 성명서는 이튿날 LA 타임스에 전문이 게재됐고 그의 인터뷰가 함께 실렸다. ‘나의 목소리를 높인다’(I Raise My Voice)라는 제목의 성명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음악과 예술에 전념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나의 전 생애를 바쳐왔다. 나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압제에 반대한다. 유혈사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극심한 위기에 질식당하고 있는 민중의 정당한 외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건강한 민주주의에는 진정한 존중과 이해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특정 정부의 필요에 맞춰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양심과 헌법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행해져야 한다. 베네수엘라 인들은 지금 복지에 대한 빼앗길 수 없는 권리와 기본적 욕구의 충족을 갈망하고 있다.
나는 대통령과 정부에게 하루 빨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것을 촉구한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찬 세계, 존중과 인내와 대화로써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나라, 모두가 열망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이루는 세계를 주어야할 의무가 있다. 이제는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시간이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성명서를 내기 전까지 두다멜은 많은 비난에 시달렸는데 “그가 침묵하는 이유는 마두로 대통령의 편이기 때문이며, 그와 엘 시스테마가 마두로의 선전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두다멜과 오케스트라는 때때로 정부의 행사에 불려가 연주하곤 했으며 마두로는 아이들과 사진 찍어서 홍보하기를 즐겨했다.
이에 대해 두다멜은 LA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연주한다. 5만명의 관중이 들어찬 스태디엄에서 연주한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이 편이거나 저편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신념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하나 되어 모인 것이다. 시몬 볼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마찬가지다. 단원 모두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오케스트라에서 싸우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성명서를 낸 바로 그 주간에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은 슈베르트 교향곡과 말러 연가곡을 시리즈로 연주하는 사이클(Schubert/Mahler Cycle)을 시작했다. 첫 콘서트가 열린 지난 5일 침통한 표정으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무대로 걸어나온 두다멜은 포디엄에 올라 한동안 오케스트라를 바라보다가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 반정부 시위 도중 숨진 비올리스트의 이야기와 함께 유혈사태에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한 후 “이날의 음악회를 죽은 학생과 모든 폭력 희생자들을 위해 바친다”고 말했다. 청중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로 화답했으며, 오케스트라 뒤쪽의 벤치 석에 앉아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베네수엘라 국기를 흔들었고, 발코니에서는 ‘비바 베네수엘라’ 외침이 들려왔다.
이날 연주한 슈베르트의 제1번 교향곡은 작곡가가 16세 때 베토벤의 영향을 받아 쓴 곡이며, 인터미션 후에 연주한 제2번 교향곡은 17세 때 작곡한 것이었다. 여기에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젊은이를 살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는 연주회였다.
LA 필하모닉은 슈베르트의 1번 심포니를 전에 한 번도 연주한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하지만 슈베르트 심포니 사이클을 처음 시도한 두다멜은 이 교향곡을 통해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성명서를 낸 셈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직도 충분치 않다는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그의 성명서 내용이 너무 미온적이라는 비난으로부터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 그의 액션이 소극적이라는 실망까지 수많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사실 베네수엘라 사태만 뺀다면 2017년은 두다멜에게 최고의 전성시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새해 첫날 그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들만 초청되는 유명한 비엔나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에 초청받아 슈트라우스의 월츠를 지휘했다. 이 음악회 역사상 최연소 지휘자였다. 특유의 열정과 에너지로 활활 타오른 이 콘서트는 전세계로 중계됐고, TV와 라디오, 오디오와 비디오를 통해 지구촌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그 며칠 후 두다멜은 스페인 여배우 마리아 발베르데와 라스베가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바로 이어서 시몬 볼리바 심포니와 함께 유럽에서 가진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전곡 사이클 연주회는 4회 모두 매진을 기록했다. 베토벤의 도시 비엔나가 포함된 이 투어는 사실상 어느 지휘자에게나 최고의 시험이라 할 수 있는 도전이었다.
그가 LA로 돌아오던 날 뉴욕타임스는 LA 필하모닉이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라며 이례적인 극찬을 쏟아놓은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한가지 서운한 소식도 있었다. LA 필을 이끌던 강력한 수장 데보라 보다(Deborah Borda) 회장 겸 CEO가 뉴욕 필하모닉의 회장 겸 CEO로 옮겨간 것이다. 보다 회장은 두다멜을 LA 필로 데려온 사람이자 그의 멘토이고 든든한 후원자였다.
“우리는 함께 변화를 추구했고, 데보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가 떠난 것은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연적인 일이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이 기관의 리더로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목표를 향해 새로운 시각과 비전을 가진 사람과 일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한 두다멜은 LA 필하모닉에게 베네수엘라와 똑같은 것을 원한다고 덧붙였다. “모두 차분히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일해 나가자는 것”이 그것이다.
두다멜은 최근 엘 시스테마 출신의 새로운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거리에서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 달 말 카라카스에서 열린 첫날 오디션에는 무려 1,000여명의 틴에이저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내가 너무 순진한지 모르겠지만 나는 음악과 희망과 청소년들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계속 연주할 것이다. 나의 조국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이 내셔널 유스 오케스트라를 오는 9월17일 할리웃보울에 데려와 연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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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타임스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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