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난 자리에 부지런한 가을 햇살이 지나가고, 여름 내내 피었던 화려한 꽃들은 이미 바람이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가을 빛 닮은 국화꽃이 소박한 꽃잎을 열었다. 창밖 너머로 따뜻한 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나이 지긋한 노인이 쇠약한 그의 아내의 팔을 부축하고 일주일의 약을 타기 위하여 CVS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에게도 '가을은 왔다.' 라고 쓰고 이 사소한 일상을 지켜보며 '아름답다.' 라고 읽는다.
다른 날 보다 조금 늦은 출근길에 마음이 바빴다.
그래도 날마다 들르는 커피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는 아침 일찍 오는 직원들에게 줄 커피와 빵을 사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 이후부터다. 내 작은 수고로 나와 일하는 이들이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고, 환하게 웃는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하다. 토스터기에 들어간 빵이 알맞게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낯익은 얼굴이 커피를 건네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오래전에 이곳 카운터에서 아침마다 내 커피 주문을 받아주던 그녀가 다시 이곳에서 일을 시작 했단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출근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앞으로 늦지 말라는 그녀의 정겨운 호통에 호탕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때 묵직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온 낯익은 사내가 반갑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몇 달 전까지 아침마다 스포츠클럽에서 만나던 미국인 친구였는데 악수를 건네면서도 도무지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몇 해 동안 다니던 스포츠클럽이 렌트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문을 닫은 지도 4개월이 지났고, 그곳에서 같은 시간대에 운동을 하며 얼굴을 익혔던 사람들도 아쉬운 인사를 건네며 뿔뿔이 흩어졌었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새로 생긴 스포츠클럽에 등록을 했다고 했다. 비록 공간이 협소하여 불편하지만 함께 운동했던 많은 이들을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즐겁게 다닌다고 말했다. 그들이 내 소식을 궁금해 했었다며 빨리 등록해 함께 운동하자고 보챘다. 지난 3년간 운동 중에 마주치면 겨우 눈인사를 주고받거나 간단한 안부나 묻는 사이였는데 그들의 기억 한 켠에 내가 남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마웠다. 난 그와 헤어져서 뒤돌아서며 간신히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는데. '그래, 프랭크였지.....!!'
며칠 전 Il Divo공연을 보러 맨해튼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동안 괘도를 벗어나지 못하게 셋업 된 인공위성처럼 집과 일터를 단조롭게 오가는 일상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평일의 도시는 눈부시게 화려했고, 공연장 주변은 일찍부터 입장을 기다리며 길게 늘어 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끔은 내 우물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림이 쉼이 됨을 알았다. 공연을 보는 동안 누리는 눈과 귀의 호사는 물론, 일과를 접어두고 감행한 외출에서의 작은 일탈이 주는 자유로움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과 사람을 바라다보는 법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의 느긋한 헷갈림조차도 온전히 내 몫 이었다.
숨 가쁘게 하루를 지내다 보면 때로는 창밖을 훔쳐보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운 좋게도 어제보다 하루만큼 더 붉어진 나뭇잎을 보았다. 문득 나보다 한참 연배의 지인이 자신을 가을날 붉게 물든 단풍에 비유하던 생각이 났다. 청소년기가 인생의 꽃이어서 밖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면, 자신은 내면의 깊은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감동시켜야 하는 심오한 세계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었다. 웃음으로 넘겼지만 어느덧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단풍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달음질치는 계절을 허겁지겁 쫓아가며 그에게 했던 질문을 나에게 되묻고 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손 가득 아프게 움켜쥐고 있는 것들의 실체에 대해서도, 또 내려놓아야 한다는 다짐과는 상관없이 현실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끼는 이중성에 대해서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오늘에 충실하며 잘 살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킬 수 있다면 왠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국화꽃 한 다발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나는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집에 가는 길에 꽃집에 들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 올랐다. 그러나 집에 왔을 때 나는 빈손이었다. 퇴근길을 서둔 탓에 꽃집에 가는 것을 잊고 집으로 달려 왔을 뿐이다. 당연히 우리 집 식탁에는 가을이 오지 않았고, 그 가을은 창밖 너머로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왜 그곳이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지극히 작고 사소한 기억 덕분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되, 다르게 생각하고 나만의 감흥을 오롯이 새기고 싶었던 장소, 단풍 덮인 들로 쏟아지던 고요한 가을 빛, 그 가을을 보며 마셨던 커피, 그리고 그 볕에 익어가는 국화꽃 등등, 이 작은 것들이 같은 듯 다른 기억으로 남아 살맛나게 하는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면 깊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의 끝에 어둠이 깃드는 하오 5시 반, 그 길 위로 오늘의 가을이 내린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버거운 생각들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한다. 내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사소한 일상이 모여 아름다운 화음을 낼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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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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