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변종덕 제21대 뉴욕한인회장 겸 한인회관 살리기 위원회 회장
어릴적 고생한 탓에 평범ㆍ소박한 꿈
20대 초반 한국서 가발사업 대박
뉴욕이민 후에도 사업성공 실패 반복
역대회장이 현회장위에 군림해선 안돼
3주간 30만달러 성금 놀라워
`어려울때 화합' 한인사회 미래 밝아
한인사회의 최대 이슈는 뉴욕한인회관 살리기 성금모금 캠페인이다. 캠페인은 부동산세 체납 문제로 차압위기에 놓인 한인회관을 지키기 위해 시작됐다. 우선 필요한 30만 달러를 모금하는데 3주 정도 걸렸다. 한인회를 사랑하는 한인들의 적극적인 동참 덕분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최종목표인 85만 달러를 모으려면 50만 달러 이상의 성금을 모아야 한다.
뉴욕한인회 전직회장을 역임한 한인회관 살리기 위원회 변종덕(72) 회장이 오늘도 ‘1달러라도 괜찮습니다. 한인 모두의 관심과 동참이 필요합니다!’를 외치는 이유다. 변 회장은 뉴욕한인회관처럼 스스로도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아왔다. 그에게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박한 희망을 꿈꾸며
그는 1944년 3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고생 그 자체였다. 6.25 전쟁 1.4 후퇴 땐 가족과 헤어져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 청량리역에서 화물열차 꼭대기에 올라 부산을 향해 갔다. 15일이나 걸렸다. 부산에서 화물선에 실려 거제도 장승포를 지나 30리 길을 더 가는 지세포가 종착지. 꼬박 3일 동안 굶주림을 참아야 했다. 그 곳에서 3년 정도 피난살이를 했다. 1년은 하루 당 3홉의 쌀 배급으로 견뎌야 했다. 그리고 2년은 배고픔을 달래려 머슴살이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에서 상사로 복무 중이던 큰 형이 3년의 수소문 끝에 동생을 찾아왔다. 그래서 피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피난으로 하지 못한 초등학교 공부는 강원도 홍천 매산초등학교에서 마쳤다. 이어 경북 구미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선 가정형편 때문에 고학을 했다. 명동서 ‘신문, 잡지, 담배 등’을 팔았다. 당시 소매치기, 불량배 등의 유혹에 시달렸다. 사춘기 나이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꼬임을 꿋꿋하게 버텼다. 그 무렵 경복과 경신고교에 다니던 친구 4명을 사귀게 됐기 때문. 부유한 집안서 자란 모범생 친구들과 지내며 ‘나도 어른이 되면 행복한 가정에서 존경 받는 아버지로 살겠다’는 평범하고 소박한 희망을 꿈꾸게 됐다.그는 “4명 중 한 친구는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3명의 친구들하고는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서로의 소식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다”며 친구들을 자랑한다.
자수성가
그는 20세에 천우사를 운영하는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조화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하청업체에 선정됐다. 하지만 공장마련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미망인들을 돌보는 마포의 성광모자원을 찾아갔다. 미망인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모자원을 운영하던 김노득 장로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공장을 빌릴 수 있었다. 김 장로는 그에게 아내감도 소개해 줬다. 할아버지가 감리교 감리사를 지낸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재원이었다. 6개월의 연애를 한 후 결혼했다. 아름다운 외모와 착한성품에 반해 아내로 삼은 것이다.
그는 23세 때 가발사업으로 전환했다. ‘삼형산업’을 차려 3형제가 함께 응암동 공장에서 ‘본격적인 가발생산’에 돌입했다. 가발 붐이 한창인 시절이라 봉천동과 화곡동에 제2, 제3의 공장을 차렸다. 하청업체가 10여 개 이상에, 종업원도 4,000명이 넘었다. 1968년 맨하탄에 지사도 설립했다. 그는 ‘당시 자고나면 돈, 돈, 돈 이었다. 한국 수출목표가 1억 달러 달성일 때, 우리가 1년에 300-400만 달러를 수출할 정도였다“며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인조머리카락을 개발하면서 가발이 사양사업이 됐다. 그가 가발사업을 접고 1970년 뉴욕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개척에 나선 이유다. 그는 브루클린에서 ‘가발행상’으로 첫 돈벌이에 나섰지만 텃새로 10일 만에 쫓겨났다. 그래서 브롱스 포담 로드의 ‘가발가게’를 5,000여 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옆에 있던 구둣가게인 ‘Buster Brown’을 인수했다. 그 구두사업이 ‘대박’이 났다. 용커스와 브롱스 메트로폴리탄에도 가게를 차렸다. 핸드백과 여성패션구두를 판매하는 5개의 프랜차이즈도 인수했다. 그렇지만 업스테이트에서 골프장과 주택건설을 추진하다가 실패하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나의 인생이 굴곡이 많았듯이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자신감이 넘쳐서 성공과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지난날을 회상한다.
▲한•흑 분규와 평화집회
그는 제19대 뉴욕한인회에서 복지재단위원장을 맡으면서 한인회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서류미비 한인들의 이산가족상봉 사업을 전개했다. 7차례에 걸쳐 100여 명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는 성과를 거뒀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미국장애인올림픽 후원회장을 맡아 선수들에게 휠체어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가 제21대 뉴욕한인회장 선거에 나선 것도 봉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기에 힘든 사람을 돕는 게 참으로 보람이었다. 그들이 만족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한다.그는 한인회장 당시 1990년 브루클린 한•흑 분규를 원만하게 해결한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당시 한인청과상점을 상대로 한 흑인들의 불법시위가 과격 운동단체들의 참여로 심각했다. 그래서 9.18일 한인 1만여 명이 뉴욕 시청 앞과 잔디밭 가득 구름처럼 모여 평화집회를 열어, 해결했다. 그로인해 한인회와 뉴욕시청간의 관계도 돈독해 졌다. 시장의 결단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한미친선방문단을 구성해 소수민족 대표 10여명을 인솔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딘킨스 뉴욕시장은 한인회에 ‘시위 중단’ 법원명령 집행을 3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바로 다음날 행동에 옮겼다. 집회에 참가한 한인 모두가 쓰레기 한 점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청소하는 자랑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줬다”고 말한다.
▲“나도 1불, 너도 1불, 50만이 50만 불!”
지난 2009년 뉴욕한인회역대회장단협의회의 의장을 맡았던 그는 역대회장은 절대 현 회장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집행부가 요청할 때는 언제든지 협조하면서 한인회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올바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직회장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한인회장 후보는 인간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양심이 없으면 ‘봉사’보다는 ‘일신상 목표달성’만 꾀하기 때문이라고. 한인회장 선출방식은 간접선거가 명분은 좋지만 그 역시 후유증이 마찬가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한인회관 살리기 캠페인 슬로건인 “나도 1불, 너도 1불, 50만이 50만 불!”은 복지재단 위원장 당시 사용했던 구호라고 귀띔한다. 당시 45만 달러의 복지성금 모금에 사용한 슬로건이 ‘나도 1불, 너도 1불, 20만이 20만 불!’이었던 것이다.
3주 동안 30만 달러정도의 성금이 모아진 것은 보통일이 아니라는 그는 ‘한인동포들이 이처럼 어려운 일에 적극 참여할 줄 몰랐다. 고맙고,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이어 85만 달러의 목표금액을 달성하기 위해 6월 말까지는 성금모금 캠페인을 전개할 뜻을 비친 그는 ”1달러라도 한인 모두가 동참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지금까지 한국 지상사들의 참여가 전무한 상태지만 가능한 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반드시 동참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강조한다.
▲‘약속’ & ‘의리’
그가 스스로 생각하는 성격은 자수성가로 ‘자존심’이 강하고 끊고 맺는 것이 확실할 정도의 고집에 할 말을 꼭 하는 스타일이다. 전직 회장의 공금유용에 관해서는 ‘형사와 민사 소송은 물론 가족과 보증인 등을 통해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명확한 입장이다.
인생의 좌우명으로 ‘약속’과 ‘의리’를 중요시 하는 그는 “어떤 약속이든 꼭 지키려고 노력하며 열 명의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좋은 친구 1명을 버리지 말자는 신념처럼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남은 인생은 그동안 시간을 많이 하지 못한 아내와 함께 하면서 복지재단 위원장 시절 뜻을 이루지 못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쉼터인 사랑의 집을 만드는데 진력하겠다는 그는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며 앞으로 한인 모두가 하루하루 행복한 길을 걸어가면 좋겠다는 게 현재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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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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