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한국에 있는 친척, 친구들과 카톡을 하고 싶은 마음에 지난 크리스마스 때 스마트폰을 장만하였다. 전화기를 항상 곁에 두고 있다 보니 종전엔 하루에 겨우 한 번 열어보던 이메일을 이제는 우편이 도착했다는 소리만 들리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인 양 반가운 마음이 되고 카톡 소리만 들리면 손가락이 먼저 춤을 추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가할 적엔 내 삶의 자국이라 할 수 있는 전화 속에 담겨있는 이름들을 살펴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한 분 한 분이 모두 정겨운 이름들이다. 이들 중 특히 세 분의 이름 앞에선 언제나 한동안 망설이는 마음이 된다. 한 분은 내가 첫 직장생활을 할 때 만난 분으로 퍽이나 두려웠던 사회로의 첫 걸음을 곁에서 포근한 눈으로 지켜보시며 응원해 주셨고 또한 처녀적의 내게 부부가 이루는 가정생활의 귀중함을 알게 해 주신 분이다. 두 번째 분은 친구의 남편으로 문학과 언어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였고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서 ‘걸어다니는 사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뒤늦게 의사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엄마, 아빠의 두 역활을 하면서 거뜬히 키운 분이다.
마지막 한 분은 고등학교 선배로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고향 사투리를 어찌나 구수하게 하시는지 동창회 모임 땐 우리를 당장 여고 소녀로 돌려놓곤 했었으며 생활 속의 검소와 주어진 권리는 주장해서 찾아야 한다는걸 배워주셨다. 이 분들을 만난 시기가 각각 나의 20대, 30대, 그리고 40대에 이뤄졌기에 한분 한분을 떠올릴 적마다 마치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 척의 나룻배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지금 세 분은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
그러기에 난 그들의 흔적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왜 이미 떠난 이를 보내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 걸까? 내게 이 분들의 이메일 주소나 전화번호를 없애는 행위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게 설령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고 전화속의 이름을 없앤다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난 뭐든지 잘 버리질 못 하는 성격이다. 몇 년 전부터 아는 언니들로부터 옷장 정리한 후라면서 구두나 옷 등을 건네받곤 했는데 나도 이젠 그 나이가 되어 나의 옷장을 간추려야 할 시기가 되어 살펴보지만 결국은 셔츠 하나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두고 만다. 평상시엔 곧잘 건망증에 시달리면서도 자선기관에 기부할 옷가지를 골라내려 하면 그에 얽힌 사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살아나 나의 가슴에 착 안기는 통에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이렇듯 작은 물품 하나도 버리질 못하는데 나와 의미있는 시간을 같이 했던 이들의 기억을 없애려는 행위는 그것이 단순히 전화번호라 할지라도 아직은 용납되지 않는다.
인연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나만의 세상 욕심에 매여 있기 때문인가?
그들을 내게서 떠나보내기 전에 나름대로 어떤 의식을 거치고 싶다. 그들의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나누어 주고 싶고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 못다 한 얘기를 특정한 장소에서 차근차근 나눈 후에야 비로소 그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첫 직장이었던 포천여중고 교정에서, 이제 곧 대학생이 될 아이와 의사가 된 친구의 집에서, 반쪽을 잃으신 최 선생님과의 만남이 먼저 있어야 하리라. 하지만 아직은 이런 만남을 의식적으로 늦춰가며 그들과의 보이지 않는 끈을 놓고 싶지가 않다.
오늘도 그들의 이름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서서히 다음 이름으로 검지손가락을 옮긴다.
‘오늘은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