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 Passion
▶ ■ 삶과 열정 - 음식열정 ‘함지박’ 김화신 할머니
22년간 돼지갈비 메뉴 하나로 한인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함지박 김화신 사장이 나눔과 경영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박상혁 기자>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건 의미가 없어요.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여생을 보내는 게 바람이야”
그녀는 본명보다는 인심 좋은 ‘함지박 어머니’로 통한다. 대화를 해보면 시원한 여장부의 기질이 느껴진다. 지난 22년간 LA 한인타운에서 돼지갈비 전문점을 운영해 온 김화신(76) ‘함지박’ 대표다. 7남매의 맏딸로 한국에서 농촌진흥청 공무원을 거쳐 농촌 계몽운동가로 명성을 떨치다 50세가 넘어 가족과 함께 도미한 그녀의 인생역정에는 낯선 땅에서 역경을 뚫고 성공한 이민자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는 김화신 대표를 만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사회운동가에서 대박집 사장으로
김화신 대표는 1938년 서울 종로구 송월동에서 5남2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13세 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이웃들에게 설탕과 굴비를 나눠줄 정도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우등생이었다. 그녀는 “아무도 안 믿겠지만 서울여상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하며 공부도 잘했다”며 “원래 놀기도 좋아하고 쾌활한 성격이었지만 대학 진학 이후 인생관이 크게 바뀌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집안의 반대로 일반 대학 진학을 포기한 김 대표는 유네스코 설립 고등교육기관 3기로 입학해 국비 장학생으로 농촌사회학을 전공했다. 농촌지도자 양성과정을 이수한 그녀는 이후 이천, 충북, 청주, 진천, 수원 등지에서 12년간 계몽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50~60년대 한국은 정말 어려웠어요. 특히 서울 외곽의 농촌 지역은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어요. 당시 어린 나이에 이질로 목숨을 잃고 죽은 자식을 안고 한없이 우는 여인의 모습을 본 뒤 자전거를 오토바이로 바꿔 타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농촌 계몽활동에 앞장섰죠”
이후 서울로 올라와 여장부다운 모습에 이곳저곳을 불려 다니며 사회운동을 참 많이 했다는 그녀는 “아마 계속 한국에 거주했다면 사교육 없애기에 앞장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늦깎이 이민생활
김 대표는 51세 때인 1989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중학생이던 아이들이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사교육비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학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현직 교사들을 가정교사로 고용하는 그룹과외를 시켜야 했는데 정말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죠. 아이들이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미국행을 결정했어요”
한국에서 공무원 및 사회운동가로 잘나가던 그녀였지만 이민생활은 절대 녹록치 않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고 김 사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주방 보조였다.
그녀는 “지금의 7가와 웨스턴 코너에 있었던 시연이라는 한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처음 일을 시작했다”며 “이후 3년6개월간 감자바위, 이태백, 모네, 옛골 등 총 5군데의 식당에서 주방 보조를 하면서 절대 지면 안 되겠다는 결심에서 이를 악물고 극복했다”고 말했다.
“이민 초기 너무 힘들어 이를 깨물며 참았죠. 지금 틀니를 할 정도니 어느 정도 힘들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나요?”
■열정과 성실이 열쇠
산전수전을 겪던 그녀는 지난 1993년 현 피코와 크렌셔의 ‘함지박’ 식당을 우연히 인수하면서 돼지갈비 전문점이라는 지금의 기틀을 만들었다. 식당을 직접 운영하게 된 이유는 식당 보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본인을 기다리기 위해 아이들이 집 앞에서 울며 기다리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가 피코와 크렌셔에 위치한 함지박을 인수하자 주변에서 모두 말렸다고 한다. 당시 식당이 위치한 곳은 총격사건도 많이 나기도 했고 코너에 있어 접근성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 공사 없이 식당을 인수하자마자 영업을 시작한 김 사장의 첫 매출은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음식에 대한 열정을 갖고 연구를 거듭하며 훈훈한 인심을 베푸니 어느덧 대박집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6가에 큰 딸이 운영하는 2호점도 냈다.
그녀는 “원래 메뉴에 돼지갈비가 있었는데 갑자기 소스가 떨어져 있던 고기에 나름 개발한 양념을 해서 제공한 것이 지금의 함지박 돼지갈비가 됐다”며 “이후 점차 매출이 늘어나 나중에는 돈을 셀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잘 되더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한 번은 여자 손님들이 너무 몰려서 알아봤더니, 남편이 연일 술을 먹고 늦게 들어와 바람을 피우는 줄 알고 뒤를 밟았는데 매일 퇴근 후 동료들과 함지박에서 돼지갈비를 먹는 것을 보고 얼마나 맛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왔다고 하더라”며 “그때 들이닥쳤던 여자분들 모두 지금은 단골이 됐다”고 일화를 전했다.
■일하는 게 취미
2년 전 불의의 차량사고로 뇌수술 후 회복 중에 있는 김 사장은 여전히 단골들이 전화를 하면 누워 있다가도 뛰어나온다. 그리고 식당의 모든 테이블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손님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등 손님과의 소통과 아낌없이 주는 넉넉한 인심 역시 그녀만의 경쟁력이라고 강조한다.
“아직도 취미를 물으면 사람들에게 ‘일하는 게 취미’라고 이야기 할 정로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해요. 사치요? 돈이 없어서 명품을 못 사는 게 아니라 일하는데 거추장스러워 블라우스도 못 입어요. 잘될 때일수록 거만하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어떠한 유혹도 물리쳐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한 비즈니스, 믿음직한 두 딸과 사위,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픈 7명의 손주 등 누구도 부럽지 않을 것 같은 김 대표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녀는 “함지박이 제공하는 돼지갈비나 음식을 아무 곳에서나 먹을 수 없는 희소성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기반으로 한 3호점을 구상 중에 있다”며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돈을 벌기보다 아프리카 지역의 우물 파기 등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인생을 마감하고 싶은 게 작은 바람”이라고 미소를 지었다.
<김철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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