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초강 임수빈 화백과 내가 인연을 맺은 때는 지난 2000년경으로 올라간다. 워싱턴 DC에 기반을 두고 먹을 것 부족하고 머무를 곳 없는 흑인 노숙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설립된 평화나눔공동체의 연말 모임자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임 화백께서 단순히 취미생활로 사군자를 그리는 줄로만 생각했다. 확실하게도 인간에겐 주체할 수 없는 예술적 ‘끼’를 가진 사람이 드물긴 하지만 분명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DNA의 그 속내를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승화된 예술의 미 속에서 인정하게 된 것이 우리의 만남의 중간 열매였다. 2009년 서울 인사동에서 생애 첫 번째 개인 전시회를 열었을 때 나는 한 주간 자리를 지켰고 그곳에서 중견화가 한 분을 뵙게 되었다. 그는 임 화백 일행이 점심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관람을 오셨는데 장장 세 시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림만 뚫어지게 바라다 볼 뿐이었다. 그리고선 단 한마디, “파리로 가세요”라고 했다.
첫 열매는 그의 품성에 반한 것이었다. 지금껏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을 뿐 더러 소위 뒷 담화를 하는 일은 아예 없었다. 다만 두고 온 고국이 걱정되어 정치 상황을 말씀하신 적은 서너 차례 있었다. 자주 베풀길 원하셨고 모든 걸 원만하게 처리하길 바라셨다.
그가 떠나고 난 지금 참 그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버지니아에서의 장례절차를 마치고 고향 충청도로 가신 후 두 차례나 그의 단아한 새 집을 슬쩍 지나곤 하였다. 아 그리움이란 이런 것인지,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들이 꽤나 눈물샘을 자극하곤 했다.
그의 예술에 나타난 중심은 생명사상이었다. 임 화백은 창조주가 창시한 이 창조 세계에 아담과 하와의 갈등으로 불거진 ‘낙원에서의 낙오’로부터 다시 그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남은 자의 사명이라 생각했고 이를 우리네 한지에 옮기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서울에서의 전시회는 일반인도 일반인이지만 중견화가들이 많이도 관람을 왔다. 이는 그의 작품이 워낙 독특했고 한지에 수놓은 오일 페인팅(Oil Painting)의 복합구도가 주는 묘한 매력 때문이었다.
이화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이미 중견화가 군에 진입한 한 여류화가는 이렇게 표현했다. “가까이서 보면 구상인데 멀리서 보면 추상입니다.”
사실 그가 한국화의 한 획을 그은 이종상 화백과 대전고 미술반 동문이지만 임 화백께서 정식으로 미술공부를 하신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제자들이나 지인들에게 임 화백의 빛나는 재능을 질투하신 어린 시절이 있으셨다 한다. 그렇기에 임 화백은 배우는 자의 심정으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섭렵하려 했고 그것이 중견화가나 평론가들의 눈엔 사갈의 모습으로 마티즈의 모습으로 피카소의 모습으로 비춰졌을 테다. 감사한 것은 파리 전시회 시 명망 있는 동양화 화백이자 서울미대 학장을 지내시고 ‘화첩기행’으로서 명문을 날리신 바 있는 김병종 화백께서 기꺼이 전시회 서문을 써 주시기로 한 일이다.
그가 떠난 지금 지나간 자료들을 살피고 공부하며 그의 미술 세계가 포비즘(Fauvism)이나 큐비즘(Cuvism)에 일정한 영향을 준 원시주의(Primitivism)에 근접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그림엔 동물과 사람들 그리고 자연의 조화가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들처럼 꿈틀거린다.
이노바 페어팩스 병원에 입원하여 계실 때 아침에 갓 만든 호박죽과 절편을 들고 찾아뵈면서 순전히 예술 얘기로만 세 시간을 훌쩍 넘긴 게 위로라면 위로가 된다. 그의 인자한 눈빛이 프랑스 파리를 말씀드릴 때 유난히 반짝이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이젠 유지가 되고 말았지만 진작 파리땅을 밟게 해드렸어야 하는데 아직 늦은 것도 아니리라. “예술가는 저 삶으로 가는 그 순간 이미 전설이 되기에.”
앞으로 펼쳐질 초강 임수빈 화백의 또 다른 차원에서의 예술 세계에 자못 내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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