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사진)을 처음 본 것은 80년대 중반. 지금은 영화음악 진영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S선배가 은밀하게 불러 가게 된 방배동 근처 지하 스튜디오에서였다.
당시 이탈리아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서 외설시비와 필름의 폐기, 상영금지 조치들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어렵게 구해 함께 보게 된 것인데, 영화가 끝난 뒤 선배들은 저마다 감독 베르톨루치의 성 정치학이니, 영상의 미학이니 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단지 영화의 오프닝시퀀스에서 보여준 그림 두 점의 강렬한 인상만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히스테리적인 오렌지색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남자와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 그림 속 두 사람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리고 뭉개진 모습이었는데 그것들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화면에 남자 ‘폴’과 여자 ‘잔느’가 등장한다. 거리를 오가며 그들은 스치기도 하지만 그뿐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 후 아무런 인과적인 사연도 없이 빈집에서 마주친 이 두 남녀는 영화 시작 속의 그림처럼 오렌지색의 텅 빈 공간 속에서 목적도 의미 지향도 없는 기이하면서도 은밀한 익명의 만남을 공유한다.
소문만큼 외설적이지도 그다지 에로틱하지도 않은, 오히려 실존적인 고독이 압도한 영화였는데 잔느의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베란다 구석에 씹던 껌을 붙여두고 죽어가는 폴의 얼굴은 영락없는 베이컨의 일그러진 초상 속 인물이었다. 그 후 관심을 갖고 사 모으기 시작한 화집들과 전시회 관람을 통해 나는 영화 속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를 베이컨이 얼마나 시적으로 정확하게 그리고 훨씬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우리는 으레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관계를 시작할 것이고, 그를 알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서정연한 단계에서 하나라도 어긋나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로 부여한 온갖 규정의 이름들, 어쩌면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 합산의 결과물일 수 있다. 사회적인 존재로 살기 위해 더 이상 내가 아닌 대중의 한 부분이 된 나는 이제 어디가 입이고 눈인지 알 수 없게 뭉개지고 변형된 모습이지만 그의 그림 속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그 온갖 규정들을 역류하면서 우리 몸속에서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욕망을 드러내며 ‘내’가 되고자 한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에 관한 책 서문에서 “인간은 서로의 행동을 모방하려 하고, 인간의 생각들은 조종되고, 따라서 인간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대중의 한 부분일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은 회의의 순간에 화가는 잔인한 제스처를 취하며 그 안 깊숙한 곳에서 숨겨진 자아를 찾아 나선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베이컨의 초상은 자아의 한계를 측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뒤틀어져야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걸까? 내가 나이기를 그만두는 한계는 어디일까? 베이컨의 그림 속 모델들은 고통과 환희가 전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틀어진 모습 속에서도 고유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것들을 쿤데라는 ‘한없이 부서지기 쉬운 것, 즉 육체 안에서 전율하고 있는 자아’라고 했다. 어느 경우에도 내면과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나, 그 존재에 대한 민감한 자각, 그것이 이 익명의 시대, 우연의 삶을 살아갈 근거이며 이유라는 것이 베이컨의 포착이며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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