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추모식이 들어있는 10월이 오면 우리 가족은 자녀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날을 잡아 어머니의 은혜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럴 때마다 화원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곱고 예쁘게 자란 꽃들이 아닌 귀할 것도 없이 아무데나 피어 있는 야생화를 한 아름 꺾어다 어머님 사진 앞에 놓는다. 세상을 모두 태워버릴 듯 내리 쬐던 여름날의 혹염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사정없이 때려대는 폭우에도 흙을 꼭 움켜쥐고 가는 줄기로 모진 세파를 견디어냈던 가을 들꽃들, 그 강함도 무서리만 내리면 한 해 살이 삶이 말라버리듯이 암이라는 된서리에 맞아 뼈마디가 이울어진 어머니의 일생도 들꽃과 꼭 닮았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밖에 없으셨던 어머니는 ‘몸의 모든 장기가 이젠 지쳤다, 더 이상 못 버티겠다’ 아우성을 쳐댔어도 늘 자녀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언제나 가슴이 습지처럼 축축이 젖어 있었기에 몸이 질러대는 비명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질기디 질긴 희생의 끈만은 끝내 놓지 않으셨다.
신음 소리조차 자식들에게 근심이 될까봐 이를 악물고 환부의 고통을 땀으로 내 뱉으시던 어머니, 굽은 허리로 업어 길러 주셨던 우리 아이들이 경쟁 심한 사회로 점점 등이 떠밀려 가면 갈수록 더 간절하게 어머니의 기도 내용들이 의지가 된다. 내게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차곡차곡 모아놓은 부모님들과의 아름답지만 가슴 저린 추억들이다. 어머니 병환 중에 계실 때 ‘어머니 세월’이라는 시로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신의 세월이 겨울을 재촉하거든 잠시만 기다려 달라 하십시오. (중략) 다 해진 치마폭에 품어 길러주셨던 제 아이들이 어머니 드릴 흰 눈 같은 모시옷 지을 동안에 기다려 달라 하십시오. (중략) 우리들 나이가 어머니 세월 될 때까지 어머니 세월은 앉아서 쉬고 계십시오.” 그러나 가지 말라고 붙잡는 자손들의 간곡한 매달림에도 어머니의 세월은 93년 10월 영원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
우리는 미국에 올 당시 부모님들의 유품 몇 가지를 유리 상자에 넣어가지고 왔다. 뜯어져서 꿰매고 꿰맨 어머니의 낡은 성경책, 알도 하나 빠지고 다리마저 부상당해 실로 동여맨 돋보기 등등. 그렇지만 그 초라한 유품들은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녀들에게 물려 줄 보물 1호가 되었다.
며칠 있으면 할머니같이 아픈 사람을 고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어머니 영결식장에서 추도문을 읽으며 약속했던 딸이 18년 만에 그 약속을 지키고 심성 깊은 신랑을 만나 가을의 신부가 된다. 햇살이 눈부시게 시리던 시월 첫째 토요일, 딸은 시 할머님을 모시고, 시부모님들과 함께 시 할아버님 묘소에 다녀왔다. 시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으로 바꾸기에 앞서 묘소에라도 먼저 찾아가 인사드린 것은 아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딸도 결혼을 하면 이제 남편 시부모님들과 새로운 세월을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딸의 행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친정 엄마로서 딸에게 귀중한 한마디를 꼭꼭 심중에 찔러 넣어주었다. 언제나 시부모님들이 베풀어 주시는 희생과 사랑을 둘이 아름답게 사는 모습으로 보답해 드리고 그분들의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인정해 드리면 남편에게 평생 사랑 받는 아내로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딸로 인하여 시댁이 따스한 훈기로 가득 차고 온 친척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집 밖에까지 넘쳐나는 것을 마음에 그려본다.
우리도 김제 들녘에서 영면하고 계시는 부모님들께 인편으로라도 사랑해주셨던 손녀딸의 결혼 소식을 알려 드려야겠다. 올해 꺾어다 놓은 들꽃에서는 유난히 어머니 사랑 같은 달큼한 향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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