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고난 사업가 기질로 가발소매 왕국 거느려
장남 버니가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장교로 임관할 때.
롱아일랜드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수입이 괜찮은 조교자리가 있었으나 캠퍼스를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이응호는 AMC라는 미국회사의 회계사로 들어갔다. 1만8,000달러 연봉이라면 1968년 당시 적지않은 봉급이었다.
200 개가 넘는 전국 백화점에 물건을 공급하던 AMC에서 2년반 동안 열심히 일하던 그에게 회의를 안겨준 사건이 생겼다.
매니저가 자리를 옮겨 공석이 되었을 때 서열로 보나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나 이응호가 당연히 그 자리로 승진하게 되어있는 상황이었는데 엉뚱한 미국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게 아닌가. 분하고 억울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때 문득 닥터 뷰렌바움의 말이 생각났다. 뷰렌바움은 그가 다닌 대학의 유대계 부총장으로 한때 기숙사가 만원이었을 때 그가 1년간 그 집에서 기숙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가 주었던 충고는 “문제가 생겼을 때 정확한 대화의 상대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가서 부딛치자는 심산으로 회사의 컨트롤러를 찾았다. 컨트롤러는 마침 미국태생 중국인 2세인 닥터 왕이었다. 사정을 청취한 닥터 왕은 우선 문부터 닫으라고 했다. 그리고 같은 피부색갈의 동양인이 되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나 CPA와 박사학위까지 가졌지만 그 역시 그자리가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 학력이 많다고 주장하지만 석사학위는 아직도 먼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응호는 뒷통수를 힘껏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닥터 왕은 그에게 두 가지 제안을 했다. 욕망이 크고 자신이 있다면 공부를 더 하라. 의향이 있다면 도와주겠다.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20년 후 쯤 한국이 일본을 뒤쫓는 무역국가가 될 전망이 보이니 한국과 관계되는 비즈니스를 찾으라는 충고였다. 이때 문득 이범선 교수가 말했던 가발 비즈니스 생각이 스쳤다. 그가 대학원을 떠날 때 회계학 교수 이범선(전 뉴욕한인회장)은 미국회사에 들어가지 말고 앞으로 5~6년간은 한국산 가발 붐이 있을 전망이니 차라리 독자적인 비즈니스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제의했을 때 한마디로 일축했던 일이었다.
2개월간 준비과정을 거치며 AMC를 그만둔 이응호는 이범선의 코치대로 맨하탄에 가발가게를 열었다. 14가 3애비뉴에 월 300달러 렌트를 얻고 AMC 시절 거래가 있던 체이스 맨하탄뱅크로부터 신용대부 5,000 달러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인모와 똑같은 화학섬유 원사 카네칼론의 출현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가발붐은 미국에서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큰 자본이 없이도 개업할 수 있었고 장사수완이 크게 필요 없었다. 재고만 떨어지지 않게 조달하면 특히 소셜 시큐리티 머니가 나오는 주말 가까이만 되면 흑인 여인들이 가격 묻지 않고 너나할 것 없이 몇 개씩 집어가는 판이었다.
개업과 더불어 재미를 보게 된 그는 흑인 고객들이 붐비는 브롱스의 3애비뉴와 브루클린의 핏킨 애비뉴 등에 모두 5개의 점포를 차례로 열었고 렌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컨세션을 파고 들었다. 컨세션은 백화점 같이 고객이 붐비는 대형 스토어의 한쪽에 매장을 얻어 비즈니스를 하면서 월매상 총액에서 20-25%를 바치는 방식의 비즈니스였다. 컨세션에서 재미를 본 이응호는 맥그로리, 울워스 등 뉴욕일원의 체인스토어 백화점에 컨세션을 15군데나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어느새 그의 점포망은 거미줄처럼 늘어나 한 주일에 한 번씩 들리지도 못하는 곳도 있었다.
이무렵 그와 비숫한 처지의 유학생 출신들이 가발 리테일에 많이 뛰어들었고 렌트가 부담되는 사람들은 이응호의 뒤를 따라 컨세션을 선호하기도 했다. 일부는 번화한 길가에 가발트리를 걸어놓는 페들러들도 여기저기 생겨났다. 1970년부터 73년에 이르는 이른바 한국산 가발의 황금시대였다. 한때 뉴욕에서 가발소매의 왕국을 거느렸던 이응호는 재고파악도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
자 외곽지역의 점포부터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은 이때가 시기적으로 가발붐이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하던 때였으므로 그가 비즈니스 규모를 줄인 것은 시의적절한 결심이었다. 이후로는 축적된 자본을 중형 슈퍼마켓으로 돌려 투자하게 됐다. 퀸즈 중산층 지역에서 메트 푸드라는 수퍼를 인수해 7년간 운영했고 그러다 보니 가정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비즈니스에만 열중한 나머지 가족들과는 동떨어진 세상을 살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82년부터 뉴저지 버겐카운티에 세탁소를 차려 94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55세라는 나이로 그가 너무 일찍 갔기 때문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된 레오니아의 연합감리교회에 500여명이나 참석했던 기억이 새롭다.
가발-슈퍼마켓-세탁소로 이어진 그의 비즈니스는 모두 성공했고 63년 미국에 오면서 관계를 맺었던 뉴욕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활동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고 동창회장을 비롯해서 KCC 회장, 실업인협회 등 단체를 이끌었고 1980년에는 박지원을 뉴욕한인회장으로 당선시키며 이사장을 맡았다. 그를 가리켜 인원 동원과 펀드 레이싱의 귀재라고들 불렀다. 그가 1968년 경기고 동창회장을 맡았을 때 연말파티에 500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인 것을 보았다고 그의 막내아우 이융호는 말한다.
생전에 김판기 전 뉴욕한인회장도 모금에는 이응호를 따를 자가 없다고 했다. 한인회장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그를 영입하려고 안달이었다.사회봉사와 인원동원의 노하우에 대해 그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우 이
융호는 ‘겸손’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몸에 밴 겸손과 진정성으로 인해 그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넘쳤다. 손아래 사람에게도 절대로 반말을 하지 않는 그의 겸손은 의사였던 그의 선친이 간호사들에게 존대를 했던 가정교육으로 부터 왔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뉴욕 최초의 동포일간지 매일신문이 창간될 때 발행인 조광남을 도와 함께 참여했으나 얼마안가 조광남이 타계하는 바람에 한때 매일신문의 경영에도 몸담았었다. 60년대 부터 80년대 말까지 뉴욕에서 사업가로, 사회봉사자로 활약했던 이응호의 유가족으로는 귀국한 미망인(이리라)과 미국사회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장남 버니(원영, 호스피스 부원장), 차남 브라이언(원우, 광고회사 디렉터), 장녀 미셀(패션회사 부사장)등이 모두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