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나는 한국을 방문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있는 미주한인성공회 성직자 연례피정이 금년에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서 스폰서를 하여 생긴 일이다.
서울 정동에 위치한 주교좌 성당은 그 성당만큼이나 주변 또한 아름다웠다. 특히 덕수궁 돌담길을 매일 주야로 걸으면서 숙소와 성당을 오가며 익힌 서울 생활은 오랫동안 기억에 머물 것 같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피정을 마치고 귀국을 남긴 며칠 사이 옷을 좀 쇼핑하러 서울의 명물인 남대문 시장을 안 둘러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도대체 가격표들이 붙어있지 않다. 일일이 상점 주인에게 “이거 얼맙니까, 이건 얼맙니까” 하고 물어야만 했다.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을 캐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왜 이렇게 불합리적이고 불편하게 해 놓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역시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건을 사러 온 고객들은 아예 터무니없는 값을 부르며 깎으려고만 한다. 어떤 고객들은 고객이 아니라 오히려 권한이 부여된 괴한이라 불리어도 어울릴만한 언행심사도 서슴지 않았다. 값을 흥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협박조로 짓누르려고 하는 언성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특히 상점 주인이 젊은 여자일 경우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히려 사정하는 투로 고객을 설득하려 하는 장면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온다.
가격표를 믿지 않으니 가격표를 달 필요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제 값 다 치루고 사면 바보라는 개념이 고객들 사이에 팽배한 것이다.
나는 한번 바보가 되 보리라 하고 눈에 쏙 들어오는 개량한복 한 벌을 가리켜 값을 물었다. 십팔 만원이란다. 모두 세 벌을 골라 카운터에 올려놓으면서 한마디 하였다. “앞으로는 그렇게 고객들에게 당하면서 장사하지 마세요. 장사란 봉사가 아니라 어차피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고 고객은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윤값을 포함한 물건값을 지불하는 것인데 이윤값은 지불하지 않고 물건 값만 그것도 원가로만 가져가겠다고 하는 발상은 상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제 값 다 받고 파세요.” 한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주인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손님에게는 한 벌당 십이 만원에 드리겠습니다. 제 친구 중 목사님이 있는데 그 친구가 생각이 나서 그럽니다.”
나는 되물었다. “아니 그렇게 하면 장사가 됩니까?” 주인은 말했다. “물론 안 되지요, 그러나 오늘은 제가 바보가 되보렵니다” 하며 오히려 고급 윗도리 한 벌을 덤으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이 주인은 자신의 친구 목회자를 떠올려본 것이다. 아마도 그 친구 목회자도 나처럼 평소에 그런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이든가, 아니면 이 주인은 목회자 사모인데 아마도 내가 목회자인 것을 육감적으로 알아차려서 동질감에서 오는 느낌에서 이런 말을 했는가 보다. 잠시 주인과 나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입 언저리에 얹혀졌다. “고맙습니다. 장사 많이 하세요” 값을 치루고 난 뒤 나는 나도 모르게 평소의 습관처럼 오른 손을 공중으로 올려 축복성호를 그은 후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보았다. 그 주인의 꾸밈없는 표정을. 나는 들었다. 그 주인의 거짓 섞임 없는 음성을. 나는 느꼈다. 그 주인의 순수한 마음의 손길을. 그 주인은 자신의 참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바보가 되어보리라 했었는데 그 주인 역시 오늘은 자신이 바보가 되어보겠다는 그 말을 뇌리에 되새겨보며 걸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어리석은(?) 희망 때문일까? 왠지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지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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