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29년, 미국 생활 16년 이제 내 나이도 오십 중반에 들어섰다. 피부는 점점 거칠어지고 엷은 검버섯도 군데군데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에는 내 이름 뒤에 시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던 낭만, 그 낭만이 미국에 오면서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오밀조밀 하고 아기자기한 고국의 산야에 대해 시를 썼던 서정 시인이기에 넓고 광활한 미국의 자연이 아름답기는 했으나 그 장엄함이 버겁고 벅차기만 했지 글로 연결이 되지를 않았다. 가끔은 등단시인이라는 부담감에 펜을 잡기도 했지만 독자들을 향한 고뇌의 흔적이 없는, 시효 지난 추억들만 우려먹는 것 같아, 억지로 짜내다 팽개쳐 버린 짝퉁 시들만 쌓여갔다.
그리고 또 하나는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부가 벌지 않으면 매달 날라 오는 공과금에 눌려 살 수가 없는 나라이기에 가족들을 위한 희생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가슴에 달고 열심히 일을 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어 나를 들여다보니 여자를 여자로 빛나게 해주는 여심이 내게선 사라져버리고 대신 엄마와 아내로만 남아있었다. 로션 하나에 화운데이션만 바르면 화장은 끝이었고, 여자들 자신감을 갖게 하는 예쁜 옷이나 받쳐주는 장신구들은 옷장을 아무리 뒤져도 맞출만한 것들이 없었다. 한 켤레 검정구두에 어느 옷이든 맞춰 입어야 했고 수년 째 한 가방만을 들고 다녀도 가족 누구 하나 관심 갖고 지적해 주지 않았다. 매일 손님들의 멋진 옷을 세탁은 해주면서도 그들만의 옷인 줄 알았고 아름다운 반지에 예쁘게 손질한 손톱을 보아도 거친 내 손과 비교하지 않았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 같은 날을 보내도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꾸밈없이 수수하게 사는 것이 내 성격인줄 알았던 남편, “우리에게는 엄마가 하나이지만 그 엄마가 우리들에게는 세상입니다”라고 착한 고백을 했던 딸과 아들 앞에서 터져버린 내 설움은 오뉴월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족들은 깜짝 놀라 허둥대며 나를 달랬지만 한번 터진 내 설움은 몇몇 칠을 두고 개일 줄을 몰랐다. 불평도 없이 지금까지 씩씩하게 살아온 날들조차도 서럽기만 하였고 엷어진 줄 알았던 지난날의 상처들이 따개비처럼 내 가슴 한구석에 눌러 붙어있는 것도 알았다. 때론 낙엽색 롱 코트를 입고 옛 추억 속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고 싶은, 가을을 타는 여자이고 싶었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가족들과 함께 나비넥타이를 맨 잘 생긴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깊은 숲이 우거진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싶었다. 저녁놀 따뜻하게 내려앉은 멋진 날 해변가 호텔 발코니에서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수고했던 날들에 감사하는 남편의 포근한 눈빛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이 평범한 사치조차 가족들은 일만 하는 내가 당연시 되어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엄마 이담에 우리가 잘 되면 엄마를 호강시켜드리겠다는 것 그것은 잘못된 말인 것 같아요. 그때가 언제 될는지 모르는데 엄마의 세월은 안가고 기다려주나요? 이 시간부터 더 잘할게요.” “여보 정말 미안해, 모두 내 잘못이야. 당신도 여자로 대접받고 싶다고 많은 사인들을 보냈는데 늘 함께 사는 아내이다 보니 편한 맘이 들어 무심코 지나쳐 버렸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사랑 표현이 쑥스러워 당신의 속울음을 모른 척 한 것 같아. 나를 비롯해 모든 남편들이 아내의 속울음을 들어봐야 해. 여보, 이제 그만 울어 고생만 시켜 너무 미안해.”
남편의 따뜻한 손이 내 고달픈 눈물을 훔쳐 준다. 가족들의 위로가 햇살이 되었는지 먹장구름처럼 무겁던 내 마음이 서서히 개기 시작했다. 비록 멋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여자답게 살지는 못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시를 쓰기 위해 많은 여행은 다니지 못해도 내 수고를 딛고 가족들이 일어설 수 있다면 절대 엄마와 아내의 자리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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