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밀입국을 위해 지불해야 했던 7만5,000달러는 중국 농촌에서도 가난했던 30대 가장에겐 엄청난 돈이었다. 그러나 후지안성의 작은 산골 구이안에 살던 왕 지안후아는 친척, 친지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빌려서 그 돈을 마련했다. 중국당국의 한가정 한자녀 정책 시행으로 그의 아내는 두 번째 아이를 당국의 명령에 의해 낙태시켜야 했다.
아내가 다시 임신하자 당국은 또 아내를 데려가려 했고 이에 항의하던 왕은 체포되어 수일간 구금상태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그의 친구들은 말한다. 그 사건은 가난과 중노동에 찌들려온 왕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왕은 임신 중인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둔 채 브로커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암담했던 자신과 가족에게도 보다 나은 삶을 찾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그를 지탱시키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한 지 3년 뒤인 지난 3월12일, 그와 그 가족의 꿈은 브롱스 인근 95번 고속도로 위에서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지난 주 뉴욕 관광버스 참사 중국계 희생자의 삶
소박한 희망 붙잡고 죽어라 일 했던 고달픈 매일
스시 식당에서 배달부였던 왕은 이날 발생한 버스 전복사고로 사망한 15명 중 하나였다. 코네티컷의 한 카지노에서 뉴욕 맨하탄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오던 ‘월드와이드투어스’ 여행사 소속 관광버스였다. 버스가 전복되며 들이받은 사인판의 기둥이 버스 앞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 버스 지붕이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사체의 일부가 잘려나가기도 한 사고의 현장은 처참했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중국계였다. 이민 1세대 고달픈 근로계층이 대부분이었다. 이 기사는 그 같은 희생자 중 한명의 고달픈 삶의 단면이다.
후지안성의 산골마을에서 자란 왕은 학교를 중퇴하고 13살부터 농사일을 해야 했다. 속마음을 들어내지 않는 과묵한 소년이었다. 그가 19살 때 아버지가 병사하자 더욱 가난해졌다.
돈을 벌기위해 후지안으로 나온 그의 20대와 30대는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밤 택시운전을 하면서도 틈틈이 병든 어머니를 돌봐야 했다. 나이 30이 되어서야 결혼한 그는 아내 린 야오 팡과 사이에 딸을 낳고 잠시 행복한 듯 했다. 그러나 아내의 두 번째 임신이 당국에 의해 낙태로 끝나고 다시 3번째 임신한 태아마저 위태로워지자 왕은 조용히 미국행을 결심했다.
브로커에 의한 미국 밀입국이 성행할 때였다. 지난 20여년 후지안에서 이렇게 뉴욕으로 밀입국한 젊은이들은 수천 수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형선박에 타고 한꺼번에 몇백명씩 들어오는 것이 중국계의 밀입국 패턴이었지만 단속이 심해지면서 브로커들은 최근엔 방법을 바꿨다. 몇 명씩 소그룹이나 혹은 개인적으로 남미나 카리브지역을 통하거나 멕시코 국경을 넘기도 한다.
2008년 1월말에 중국을 떠난 왕은 3월 많은 후지안 출신 밀입국자들이 정착한 뉴욕의 차이나타운에 나타났다. 그는 5명의 남자들과 함께 기거하는 초라하고 좁고, 자동차 소리 시끄러운 아파트의 벙크베드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왕은 자전거부터 마련하여 ‘아이언 스시’라는 식당에서 배달 일을 시작했다.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하는 그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아침은 오트밀로, 저녁은 피자 한 조각으로 버티며 아주 가끔 큰맘을 먹으면 맥도널드에 들렀다. 주급은 500달러 최저 생계비를 제외하곤 모두 고향으로 송금했다. 가족의 생활비와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의 생애에서 이례적 ‘사치’는 랩탑 구입이었다. 가장 싼 것이었지만 이웃의 와이어리스 시그널에 얹히면 가족들과 인터넷 무료통화를 할 수 있었다. 임신했던 아내는 그 사이 아들을 낳았다. 하루 잠자기 전 비디오 통화로 어린 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지치고 고달픈 그의 삶에 하일라이트였다.
그의 매일은 ‘일과 돈이 전부였다. 죽도록 일했지만 그의 머릿속에 꽉 찬 돈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가족들도 데려와야 했고 빚도 갚아야 했다. 그는 중국당국의 강제 가족계획을 이유로 이민 변호사를 통해 망명을 신청했다.(그의 사망 당시 망명신청은 아직 유보상태였다)
그 무렵 왕은 차이나타운에서 매일 카지노를 왕복하는 값싼 버스투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목적은 도박이 아니었다. 버스비엔 공짜 음식과 일정액의 도박권이 포함되는데 공짜로 나오는 도박권과 음식을 잘 되팔면 한번 투어에 30달러 정도를 남길 수 있었다.
지난해 말 왕에겐 시련이 닥쳤다. 배달 중 자전거 사고로 팔을 다친 것. 4개월간 일을 못하고 월 200달러의 직장상해보험 혜택으로 버티어야 했다. 고향 송금을 위해 돈을 빌려야 했고 1주에 한번 가던 버스 투어를 서너번으로 늘렸다. 어느 날은 하루 2회 왕복을 하며 무료 도박권을 다른 승객에게 팔아 조금씩 돈을 남겼다.
월200달러를 내고 3명의 룸메이트가 함께 기거하던 좁은 아파트 베드룸은 아직 제대로 풀어놓지도 못한 세 남자의 이민 짐으로 비좁았다. 왕의 침대 옆엔 그의 보물이던 랩탑이 주인을 잃은 채 놓여있고 낡은 플라스틱 박스엔 그의 ‘귀중품’들이 들어있었다. 스시식당의 직원 ID카드, 전화번호가 가득 적힌 작은 수첩, 카지노의 1달러짜리 칩 몇 개…그것이 전부였다. 가족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찌들린 가난 속에서 평생 고달팠던 한 남자가 남긴 생의 흔적도 초라하고 쓸쓸하기 짝이 없다.
남은 가족들의 사정은 더욱 막막하다. 채권자들에겐 아직 그의 사망소식조차 못 알렸다. 왕의 변호사는 미망인과 자녀들의 임시 비자를 신청하려한다. 그가 묻히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걱정했던 가족들이 그를 한 번 보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뉴욕타임스-본보특약>
3월12일 버스사고로 사망한 왕 지안후아. 사방에서 빌린 돈 7만5,000달러를 브로커에 지불하고 3년 전 밀입국한 가난한 중국계 가장이었다.
왕의 생계수단이었던 자전거가 낡은 아파트 계단 아래 주인을 잃은 채 서 있다. 그는 스시식당에서 배달 일을 해왔다.
왕의 ‘귀중품’: 스시 식당의 직원 ID카드와 작은 수첩, 모히건 선 카지노의 1달러짜리 칩 몇 개…
중국에 남아있는 아내와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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