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숙했던 미국인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아이티 돕기’나서
자원봉사하다 숨진 19세 대학생 딸의 소원 따라 고아원 설립도
도시 전체를 거대한 폐허로 바꿔놓았던 아이티 지진참사 1주년을 맞던 지난 1월12일, 매사추세츠 워체스터에 거주하는 렌과 셰릴란 겡겔 부부는 오후 4시53분 교회에서 머리를 숙였다. 1년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 프랭스에서 맏딸 브리트니가 죽은 순간이다.
브리트니는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몬태나에 묵고 있었다. 같은 날 콜로라도 주민 댄 울리와 짐 걸리는 포르토 프랭스의 호텔 몬태나를 다시 찾았다. 1년전 럭셔리 호텔에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의 지옥으로 변해버렸던 그곳, 그들이 암흑 같은 잔해 속에 50시간 이상 갇혀 있다가 구출된 곳이다.
2010년 1월15일 지진으로 폐허가 된 수도 포르토 프랭스의 ‘호텔 몬태나’ 주변을 유엔군들이 돌아보고 있다.
호텔 몬태나의 엘리베이터 샤프트에 갇혀 있다가 65시간 만에 구출되던 댄 울리.
댄 울리가 폐허에 갇혔을 당시에 쓴 일기.
1년 전 그 호텔에서 숨진 남편 짐을 추모하기 위해 리사 버치는 10살짜리 딸을 데리고 시애틀 집 근처 남편의 무덤에 꽃다발을 바쳤다. 그리고 딸과 함께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바닷가를 찾았다. “오늘이 그가 죽은 날이지요. 지난 1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린 그를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라고 버치는 12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을 추억했다.
그날 지진으로 무너진 호텔 몬태나에서 죽은 희생자의 유족들과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구조대들이 5층 호텔의 잔해 속에서 생존자와 시신을 발견해내던 3개월 동안 펼쳐진 비극은 자신들의 생에서 도저히 떼어 놓을 수 없는 영원한 한 부분이 되었다고 말한다.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호텔 몬태나의 잔해는 계속 TV로 방영되면서 아이티 지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17명의 미국인을 포함, 80명이 숨진 호텔의 잔해는 마치 팬케익처럼 납작하게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호텔 몬태나의 비극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지난 1년이 변화의 한 해였다고 말한다. 애도와 체념을 반복하다 현실을 인정하게 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숨 쉬던 그곳, 아이티를 돕겠다는 결심이 서기까지.
지난 한해의 슬픔은 헤어나기 힘들 만큼 깊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생일과 명절을 견디어야 했고 생존한 사람들은 많은 동료들이 죽었는데 자신은 살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 지진은 나의 삶을 ‘전 과 후’로 가르는 분수령이 되었다”라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댄 울리(40)는 말한다. 그때 울리는 호텔 로비 근처 칠흑같이 어두운 엘리베이터 샤프트에 갇힌 채 65시간을 견디었다. 당시 그는 기독교 자선단체인 ‘컴패션 인터내셔널’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아이티에 머물고 있었다.
울리의 스토리는 그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에게 쓴 피로 얼룩진 굿바이 일기가 후에 전해지면서 유명해졌다. 부상을 당한 그는 아이폰의 응급처치 앱의 도움으로 상처를 치료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1년 그는 당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저술했다. 제목은 “흔들림 없이: 아이티 호텔 몬태나의 폐허에서 일어나다” - 어려운 환경 속 믿음의 힘에 대한 증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파견된 소방관들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발이 부러지고 머리에 부상을 당했지만 그는 살았다. 그러나 함께 갇혔던 동료 데이빗 헤임스는 사망했다. 울리는 지난 6월에 자신을 구출해준 소방관들을 만났고 12월에 다시 그들을 방문했었다.
“난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 난 축하해야 하나? 내 가족들에게 살아 돌아왔으니. 슬퍼해야 하나? 너무나 많은 비극이 발생했으니. 옳던 틀렸던, 난 양쪽을 다했습니다”
지난 12일 울리는 1년 만에 처음으로 아이티로 돌아갔다. 다시 짓고 있는 호텔 몬태나에서 짐 걸리와 다른 생존자들을 만났다. 145개 객실을 갖추었던 호텔에서 남은 것은 컨퍼런스 룸과 몇 개의 부대건물 뿐이었다.
감리교 목사인 걸리는 당시 5명의 동료들과 로비 한쪽에 갇혀있었다. 지하에 갇혀있던 55시간 동안 2명의 동료가 죽었다. 걸리 목사(65)는 지진의 경험으로 아이티에 대한 사명감이 더욱 깊어졌다고 말한다. 그 후 8번이나 아이티로 돌아가 농부들을 돕는 교회와 일해 왔다.
“난 사람들을 섬김으로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지진으로 죽을 뻔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요”
겡겔 부부는 죽은 딸을 기리기 위해 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했다. 지진 발생 몇 시간 전 브리트니는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 난 내가 할 일을 찾아냈어요. 아이티에 고아원을 지어주고 싶어요.
플로리다 주 보카라턴 소재 린 유니버시티에 재학 중이던 브리트니(19)는 고아원 자원봉사를 위해 아이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함께 일하던 린 유니버시티 학생 3명과 교수 2명도 호텔 몬태나에서 숨졌다.
겡겔 가족은 브리트니가 꿈꾸었던 고아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브리트 처럼(Be Like Brit)’이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다. 1만9,000스케어피트의 건물은 브리트니의 이름 첫 자인 B자 형으로 설계될 것이다. 브리트니가 방문했던 어촌에 세워질 고아원은 2012년 완공 예정으로 33명의 여자아이들과 33명의 남자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브리트니는 지진발생 33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브리트니 겡겔
남편을 잃은 리사 버치(47)도 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위해 담요를 만들어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남편 짐 버치(50)는 당시 아이티 출장 중이었다. 그들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가족사진을 손에서 떼어 앨범 속에 넣을 수 있게 될 때까지의 지난 1년은 리사에게 감정의 기복이 극심했던 시련의 시기였다. “이젠 혼자 서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는 그녀는 상실감을 아이티를 돕는 일로 메우겠다고 말한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아이티에 있을 겁니다. 도움이 필요한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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