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현자 요가난다(1952년 몰)의 명상센터인 ‘레익 쉬라인’은 언제보아도 아름답고 평온한 도심 속의 작은 낙원이다. 언덕에 올라서면 태평양이 뜨락이다. 이랑지며 달려온 파도가 저만치서 부서지곤 한다.
굳이, 별도의 명상 룸에 자리를 틀지 않아도 호숫가를 따라 난 길이나 숲 속의 산책로를 걷다보면, 센터 전체가 명상 그 자체이기에 바로 ‘앉은 자리가 꽃자리’가 된다. 예사롭지 않은 서기가 물안개처럼 호수 위로 피어오른다.
길섶이나 언덕배기에 뜨문뜨문, 아직까지도 몸 낮추고 꽃피운 화초들이, 맵싸한 바람이 지날 때면 애잔하게 흔들린다. 호수에 비친 뭉게구름 위로 우아하고 여유롭게 떠도는 백조들, 바쁠 것 없는 비단잉어들의 움직임은 게으르나 그윽하다.
맑고 발랄한 산새들의 지저귐으로 귀속이 자리자리한데, 연신 쏟아내는 폭포수의 수다는 차라리 적막을 깊게 한다. 이 쓸쓸하기까지 한 서정 속에서, 홀로 돋보이는 동화 같은 풍차는 짐짓, 깊은 삼매에 든 모양새다.
처처마다 어디서고 한없는 이완에 젖어든 사람들. 차마 조심스럽고 한가하게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은근한 미소는 살갑다. 그들은 지치거나 아프거나 흔들리거나 거칠거나, 그 전부가 아니거나 따스한 둥지로 돌아온 새들처럼 모두가 안심인 듯하다. 차갑도록 짙푸른 하늘은 마냥 눈부신데…. 잔잔하지만 누를 수 없는 감흥이 혈관을 타고 번져나간다.
그렇다. 그러나 비추어보면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정경도 빈 공간에 의지해, 저마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한 폭의 빼어난 수채화가 되었다. 그래, 빈자리가 있어야 무엇이든 기댈 수가 있다. 그래, “비우고 또 비우면 거기에 다 있다”했나니.
텅 빈 공간은 허허한 공이다. 그러나 그 허허한 허공은 그냥 허공이 아니다. 그것은 배경이며 여백이다. 어쩌면 형형한 구도자가 서야 할 마지막 자리인지도 모른다.
배경은 자신에게 몸을 맡긴 하 많은 존재들을 존재이게 하는 생명의 에너지며 조화의 근원이고, 더불어 공명하여 세상을 이루는 완성이다. 그것은 궁극의 가치다. 그러나 배경은 결코 앞서, 고개를 치세우지 않는다. 어둠이 깊어 별들은 더욱 빛나듯이. 구름을 그리면 아름다운 달은 저절로 드러나듯이, 스스로 어둠이 되고 구름이 된다.
따라서 누구든 배경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 질긴 아집의 장력을 벗어나야한다.
그것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이며 미덕이다. 남에게 제 몸을 온전히 열어버린 성스러운 바보(?)들의 고귀한 몫이다. 그러므로 ‘배경’이 주는 탈속의 초연함과 헌신은 천진하다. 참으로 아름답다.
그대 그리고 나, 한번이라도 누구의 배경이 된 적이 있는가.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속물로 살다, 그대로 속절없이 죽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시인 김 소연(1946- )의 시 중, ‘배경’이란 작품이 담고 있는 소망과 서원은 간곡하다. ‘…/ 꽃잎과 꽃잎 사이/ 저 비움이 없다면/ 어이 아름다울 수 있으랴/ 허공이 쌓이고 쌓이면/ 푸른 하늘이 되듯/ 비우고 또 비우면/ 어느 누구의 배경이 될지.’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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