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직 카메라기자 50대 한인노숙자 본보 단독 인터뷰
거리마다 내 걸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북적거리는 샤핑몰로 대변되는 연말연시... 그러나 그 밝고 즐거움 이면에는 노숙자들처럼 추위와 배고픔을 겪는 소외된 이웃이 있다. 시카고 한인사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수년전부터 시카고 한인타운 인근을 배회하는 한인 노숙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얼마되지 않았으나 시카고에도 한인노숙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본보는 그동안 이들의 사연을 들어보기위해 여러차례 수소문했으나 접촉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마침내 한인남성 노숙자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는 연말연시에 비록 개인적이긴 하지만 한인노숙자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돼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전재한다.<편집자주>
50대 K씨, 그도 한때는 괜찮은 직장인이자 한가정의 아버지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으나 현재는 당장의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노숙자 신세다. 혹자는 사람이 게을러서, 힘들게 일하기 싫어서 노숙자가 된 것이 아니냐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사자는 나름대로 입장과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K씨도 자신이 노숙자로 전락한 데는 자신의 잘못이 가장 크긴 하나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움의 손길보다는 비난과 멸시가 먼저였다고 토로했다. 지난 10일 시카고 한인타운 인근 모 복지기관에서 만난 K씨는 까치머리에 털모자를 눌러쓰고 때가 꼬질한 스웨터를 입은 채 나타났다. 겉모습은 길에서 흔히 보이는 다른 노숙자들과 달라 보일 것이 없었다. 다 닳아 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신발을 신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그의 말대로 2주간 씻지 못한 탓인지 고약한 체취마저 풍기고 있었다.
■한국서 카메라기자 근무, IMF때 해고
올해로 50대 중반이 된 K씨는 과거 한국에서는 한때 잘나가던 언론인이었다. 현재는 로이터통신으로 인수합병된 영국의 국제영상매체 VIS뉴스의 카메라기자로 근무한 그는 1986년 아시안게임, 88올림픽 등 한국사회의 굵직한 뉴스를 영상으로 담아 세계 곳곳으로 송출했던 장본인이다. 카메라기자가 되기전에는 충무로에서 유명 촬영감독의 조감독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전문적인 직업을 갖고자 카메라 외신기자에 응시했고 당당히 합격해 당시로서는 결코 흔치 않은 외국방송국의 카메라기자가 됐다. 이어 결혼도 하고 두 자녀도 낳았다. 사람 좋아하고 여기저기 다니기를 좋아했던 K씨로서는 천직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오래갈 것 같았던 그의 행복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사회의 수많은 가장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한국 경제를 뿌리 채 뽑아버린 IMF의 풍파 때문이었다. 1998년 정리해고당한 그는 그 충격으로 술에 빠졌고, 점점 더 심해져 끝내 부인과 이혼하기에 이른다. 당시 7살, 5살이었던 아들, 딸과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K씨는 “그 당시에는 살기가 싫었다. 직장을 잃고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에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술을 마시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일 뿐이었다”면서 “아이들과 아내가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가버리고 난 후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롭게 나만 홀로 남겨져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산지 1년 후인 2000년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정신차리기로 결심하고 술을 끊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오기로 결정하고 지인이 있는 시카고에 첫발을 디뎠다”는 그는 “시카고에 와서는 목수 및 전기 관련 건축일을 배웠고 여기저기 일할 곳이 많아 재미있었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면 타주에 있다는 아내와 아이들도 찾을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3년정도 지나 자리가 잡혀갈 무렵 갑자기 그에게 또다시 큰 위기가 찾아왔다. 작업을 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며 어깨를 다친 것. K씨는 보험이 없던 터라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서너달을 집에서 누워지냈다. 힘겨운 위기에 봉착한 그는 이겨낼 수 없던 어려움에 끝내 또다시 술의 기운을 빌리게 된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한시도 제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이 되면 술을 마시고 낮이 되면 술기운에 취해 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을 잘 넘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다시 술을 입에 댄 탓으로 생활은 엉망이 됐고 노숙자로 전락하게 된 겁니다."
1년이 넘도록 병치레와 잦은 음주로 인해 시카고에 와서 3년동안 열심히 벌어놨던 돈마저 다 쓰고 생활능력을 잃은 그는 2004년 살던 곳에서 쫓겨나 가방하나에 옷가지 몇 개와 길에서 주운 휴대용 라디오만을 챙긴 채 길거리를 헤매게 됐다. 다른 노숙자들을 만나 무료급식을 실시하는 곳을 따라 다니며 한끼 식사를 해결하고 때로는 다운타운 인근까지 걸어가 하룻밤 잠을 청하는 차량한 신세가 된 것이다.
■알콜중독으로 노숙자 전락, 재기 몸부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한다던 쉘터마저 그에게는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지옥과 같은 장소로 전락해 버렸다. 쉘터에 동양인 노숙자는 거의 없을 뿐더러 들어가더라도 덩치 큰 흑인과 멕시칸 노숙자나 마약중독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룻밤 누울 곳을 찾는 일이 제일 어렵고 힘든 과제였던 K씨는 알콜중독, 위장장애, 신경쇠약 등 몸이 만신창이가 돼 2009년 3월 끝내 추위를 피해 들어갔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쓰러지고 만다. 이후 병원에서 근무하던 한인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겨 1년간 거주하며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잠시 잊고 지냈지만 올해 3월 다시 노숙자 생활로 돌아왔다. K씨는 술로 연명하던 생활을 잠시 멀리하고 매일 새벽이면 플라스키와 포스터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인력시장에서 하루 일거리를 찾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거리가 있으면 며칠동안은 밥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잠자리다. 현재 모교회 지하 보일러실에서 자고 있다는 K씨는 "이마저도 언제 쫒겨날지 모르겠다. 교인들이 좋지 않은 소리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조만간 그곳도 떠나야 할 것 같아 지낼만한 곳을 찾고 있다"고 토로했다. "따뜻한 물에 깨끗하게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따뜻한 이불을 덮고 마음 편하게 한번 자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누워 자는 쪽잠으로는 두세시간 정도밖에 잘 수 없어요. 정말 힘들지만 잠을 자야 내일을 살기에 억지로 잠을 청합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노숙자 생활을 청산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식당 등 한인업소 여러 곳을 다니며 일을 하고 싶다고, 무슨 일이든 시켜달라고 말했지만 돌아 오는 말은 ‘안된다’, ‘자리가 없다’는 거절뿐이었다"며 "ID가 없어서, 영주권자가 아니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안된다고 거부하지만 결국은 노숙자라서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인업체 곳곳에서 힘든 일을 하는 멕시칸들 보다 못한 처지를 실감하게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외국방송국의 카메라기자였다 실직후 미국으로 옮겨와 결국 노숙자로 전락해버린 K씨는 이렇게 말한다. "현재의 이 시간이 제일 중요하다. 과거의 영화와 성공은 지금 바라보면 추억일 뿐이다. 지금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이 몸뚱아리 뿐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픈 목표가 생겼다"고...
시카고에 K씨와 같은 한인노숙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쉘터에서 마주치는 한인 노숙자가 최소 두세명은 더 있다는 K씨의 전언과 주변에서 한인 노숙자들을 종종 목격한다는 일부 한인들의 전언으로 한인노숙자수는 의외로 상당수에 달할 것으로 짐작된다. 연말연시가 되면 한인사회 곳곳에서 한인이나 타인종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모금 및 자선행사들이 이어진다. 이제는 한인노숙자들의 실태를 파악해 이들을 위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한인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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