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군 파병은 소련의 안보리회의 불참 덕분
1950년 6.25 동란은 딘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미국 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된다는 발언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5개월만에 북한의 남침이 시작됐다. 당황한 것은 미국이었고 당시 미국의 입장은 지체없이 한국을 돕되 유엔을 등에 업자는 전략이었다. 서둘러 소집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시간 25일 오후 2시에 열렸다. 이 회의에는 소련을 제외한 10개 회원국 대표들이 모두 참석했다. 소련의 말리크 대표는 당시 중국의 대표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그해 1월부터 유엔 회의를 보이코트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참했다. 안보리는 미국대표가 제의한 결의안을 9대0으로 채택했다.
참석 10개국 가운데 유고 대표가 기권을 했다. 결의안의 요지는 1.북한은 즉각 38선 이북으로 철수할것 2.북한은 일체의 군사행동을 중지할것 3.유엔 회원국은 북한에 대해 어떤 종류의 원조도 중지할것 4.유엔 한국위원회는 이 결의안이 시행되는지를 감시해 안보리에 보고할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2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한국 전선에 미군을 출동시킨다는 성명서가 나온 것이다. 이어서 유엔안보리는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한국에 있어서의 안전보장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도록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말리크 소련대사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했더라면
당연히 유엔결의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상임이사국 중 단 한나라만 거부해도 결의안은 통과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안보리 이사회의 결의가 있던날 소련대표 말리크는 롱아일랜드 글렌코브의 소련외교관 단지 부근 퍼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소련은 8월에 접어들어 안보리에 복귀하면서 7월까지의 모든 안보리 결의가 무효라는 주장을 했지만 다른 회원국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흐지브지 되고 말았다. 소련이 불참했던 이기간 만약 한국의 유엔가입안이 상정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이 들지만 역사에 있어서의 가정은 무의미할 뿐이다.
트루먼의 미군 파병 선언에 따라 미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6월29일 한국전선을 시찰한데 이어 7월1일에는 최초의 지상군 스미스부대가 투입됐다. 유엔안보리는 이어 7월7일 한국에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켜 총16개국의 전투부대와 5개국의 의료및 시설지원을 이끌어냈다. 유엔군을 미국지휘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최초의 유엔군 사령관에 맥아더 장군을 임명했다. 이로서 한반도 전체가 적화될뻔 했던 위기가 사라지고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북진이 계속됐다.
북한 김일성은 6.25를 일으키면서 미국의 개입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미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대거 참전하는 사태로 발전함으로서 그의 예측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또한가지 그의 착각은 북한이 남침을 하면 남한내 동조세력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3주면 끝난다던 전쟁이 3년이나 끌었던 점이다. 남한내 빨치산이 봉기하지 않았던 사실을 놓고 김일성과 이를 주장한 박헌영이 대판 싸웠다는 후문이 최근에 전해지고 있다. 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지닌 인텔리층에서는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것이 뻔한 이치니까 이제 한반도는 별수없이 적화될수 밖에 없다며 서둘러 자포자기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해 11월23일 이대통령은 유엔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체류중이던 외무장관 임병직을 주 유엔대사에 임명했다. 전쟁을 치루면서 유엔과 미국의 원조가 주임무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임병직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0층에 상주 공관을 마련했다. 뉴욕총영사관에 이어 뉴욕에 두번째로 설립된 대한민국 공관이었다. 설립 일자는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1년 11월6
일로 되어있고 공식직명은 초대 유엔 상임 옵저버였다. 상주 대표부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대통령 특사 조병옥이 한때 대표 역할을 했고 1950년 6.25동란이 발발했을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주미대사 장면이 한국 대표로 참석해 유엔에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임병직이 1951년 11월 부터 1960년 9월까지 9년간 초대 유엔대사를 지낸 이후로 2대 임창영, 이수영, 김용식, 한표욱, 박동진, 문덕주, 윤석헌, 김경원, 최광수, 박근, 박쌍용, 현홍주, 노창희, 유종하, 박수길, 이시영, 선준영, 김삼훈, 최영진, 김현종에 이어 현재 22대 박인국 대사가 재임중이다.
공관 개설이래 주 유엔대표부의 가장 큰 난제는 유엔가입이었다. 1949년 제4차 총회에 유엔 가입신청을 했지만 거부권을 가진 소련등의 반대로 계속 지연되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자유중국등 5개국이었으나 자유중국 대신 1971년 본토 베이징 정부가 그자리를 차지했고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가 대신 상임이사국으로 오늘에 이로고 있다. 유엔 가입을 놓고 공산국가가 가입하려면 미국이 비토를 했고 한국이 가입하려면 소련이 비토를 하는 양상이 되풀이 됐다. 그러다가 1973년에 동독과 서
독이 동시에 가입하면서 분단국의 동시가입은 양진영에서 서로 반대하지 않는 입장으로 흘렀다. 1990년 한국이 소련과 외교관계 맺으면서 소련이 한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북한이 동시가입 안을 받아들였던 것. 동시가입은 1991년 실현됐다. 이해 9월17일 제46차 유엔총회가 안전보장이사회 권고안을 채택, A/46/L.1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함에 따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유엔회원국으로 가입하였음을 선포했다. 한국정부가 가입신청을 낸지 42년만에 이루어진 셈.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회원국이 되어 태극기와 인공기가 유엔본부 앞에 나란히 펄럭이고 있다. 이후로 남북한은 그간의 반목과 대립구도에서 서로의 체재를 인정하고 평화통일과 공존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마련한데 그 의미를 둘수 있다.
긴급 안보리에 불참한 소련대표 말리크의 공석
■ 맨하탄 이스튼 45가 대한민국 공관건물
유엔대표부 99년 11월, 1년후 총영사관 입주
현재 뉴욕의 대표적인 대한민국 공관은 맨하탄 동쪽 45가 소재 유엔 대표부및 뉴욕총영사관 건물이다. 유엔본부로 부터 약 50미터 전방에 있는 지하1층, 지상 11층 건물로서 대지 271평, 건평 2,170평 규모다. 층별 용도는 지하 차고및 기계실, 1층 리셉션 홀, 전시실, 안내실및 경비실이 있고 2층에는 대회의실, 전시실이 있다. 3층에는 통신실과 전산실, 4층부터 6층은 총영사관 사
무실, 7층 부터 11층까지는 유엔대표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 1993년에 부지를 매입한데 이어 이듬해 설계 계약을 맺었고 87년에 기공식, 98년에 상량식, 99면 11월에 유엔대표부가 먼저 신청사에 입주했다. 이어 2000년 10월 뉴욕총영사관이 입주했다. 그러나 민원실은 아직도 파크 애비뉴 57가에 있는 한국센터 건물에 문화원과 함께 잔류해 있다.
대표부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 I.M.페이가 설계를 했고 1층 전시실과 외부공원 정원및 2층 회의장등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반영했다. 또한 로비에는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335 E. 45 St. 소재 유엔대표부와 뉴욕총영사관 합동 청사
조중무<언론인,한국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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