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활동과 사건들로 엮어본 미동부 한인이민사
대한민국 초대내각에 유학파 4명 포진
내무장관 윤치영. 재무장관 김도연. 상공장관 임영신 외
조병옥.임병직.허 정. 김활란 등 이승만 정권서 활약
조국해방과 더불어 미국으로 부터 썰물처럼 귀국한 유학생 출신들은 신생 한국정부의 각분야에 들어가 공헌한 바가 크다. 일제시대 국내 알리바이가 성립돼 친일 의구심에서 자유롭다는 선명성과 미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지식 엘리트로서의 대우도 받았다. 그가운데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통해 이승만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인사들은 제철을 만나 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당시 발표된 초대내각 명단에는 유학파 4명이 포함됐다.
내무장관의 윤치영과 재무장관 김도연, 상공장관 임영신은 미국 유학파였고 외무장관 장택상은 영국 에든버러 출신이었다. 그외에도 조병옥(대통령 특사, 내무장관), 임병직(외무장관, 유엔대사), 허정(제헌 국회의원, 교통장관, 서울시장, 과도정부 수반), 백낙준(문교장관), 이순용(내무
장관, 체신장관), 장기영(체신장관), 장석윤(내무장관), 이철원(공보처장), 갈홍기(공보처장), 김활란(유엔 한국대표, 이화여대 총장, 공보처장)등이 이승만 정권에서 활약한 미국 유학파들이었다. 뉴욕에서 화초장사를 했던 이기붕도 이 대열에 끼었다.
한편 유학시절 도산 안창호계로 분류되어 이승만 정권에서 다소 소외됐던 인사들은 1960년 4.19 학생의거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 시절에 발탁되어 그들 역시 민주화된 조국을 위해 헌신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일형 (국회의원, 외무장관), 오천석(문교장관), 장리욱(서울대 총장, 주미대사), 한승인(주불 공사), 임창영(주 유엔대사)등이었다.
최초의 여장관 ‘치마두른 대장부’ 임영신
초대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임영신은 해방전 구미위원부 시절 이승만으로 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거절한 인물로 유명해 졌지만 또한가지 그가 장관 취임 직후 여성을 비하한 소변 자세를 놓고 화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상공부 부하직원들이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앉아서 누는 사람에게 어떻게 결재를 맡으러 가느냐면서 거부반응을 보였던것. 지금 같아선 말도 되지않는 그런 반응에 의연하게 대처했던 임영신은 나는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동안 싸워왔다. 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이상 활동도 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인사를 못하고 결재를 맡으러 오기 싫어하는 사람은 당장 사표를 내라. 언제든지 수리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치마두른 대장부의 기질을 발휘했다.
중앙대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암탉 소신으로도 유명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야유를 받을때마다 암탉은 무턱대고 우는게 아니다.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큼직한 알을 낳고 그것을 보호하고 단속하기 위
해 운다며 여유있게 맞서 남성들을 무색케 만들었던 치마두른 호걸이었다. 여성장관 임영신에 대해 당시만해도 남존여비 사상에 흠뻑 젖어있던 시대여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그러나 임영신은 의연하게 상공행정을 펼쳐나갔다. 전력난, 석탄문제등이 난제로 대두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전적인 후원으로 해결이 잘 되어나갔다. 임영신은 경무대 결재를 받아오는데 명수였고 관련 부처와도 협조가 잘 이루어졌으므로 부하들에게 점차 인기를 얻어 한때 명장관 소리도 들었다.
▲임영신과 임병직
유엔대사로 뉴욕생활 9년 기록 임병직
해방전 워싱턴 구미위원부 시절부터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활동했던 임병직은 1949년 제2대 외무장관에 임명되면서 건국초기 한국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서 1975년 은퇴할때 까지 일관된 삶을 살았다. 6.25동란이 터지자 현직 외무장관으로 제5차 유엔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해 북한의 남침을 세계에 호소하는 외교전선을 폈다. 유엔활동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현지에서 유엔대사로 임명받은 임병직은 1951년 9월21일 뉴욕부임 이래 1960년 9월19일 귀국할때 까지 이틀이 모자라는 9년간 꼬박 유엔대표부를 지킨 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제2의 고향이라고 곧잘 말했다. 뉴욕 부임초 맨하탄 32가 7애비뉴에 있던 펜실베이니아 호텔에 장기투숙, 하루 숙박비만 20달러씩 지불했다는 그는 대사 임명을 받자 곧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8층에 사무실을 장만했다.
유엔 한국대표부 주최로 파티 한번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어려운 형편이어서 그는 타국 대사관이 주최하는 파티마다 빼놓지 않고 참석해 한국문제를 홍보하는 장소로 적극 활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임기중 임병직은 한국전 휴전반대 활동을 비롯하여 이승만의 느닷없는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각국 대표들에게 설명하느라 곤욕을 치렀고 경제원조를 얻기 위한 외교활동, 한미재단 창설과 원조활동, 제네바 회담 참석, 유엔가입을 위한 부단한 노력, 유엔대표부 사무소 설치, 통일을 위한 갖가지 활동등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외교관으로서 그의 일상태도는 항상 공부한다는 자세였다. 그래서 그의 책상은 연감, 사전, 백과사전, 역사서적, 신간서적, 그리고 참고문헌들로 들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민주당정부 유엔대사 임창영
1930년 펜실베이니아주 이스턴에 있는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한 것이 독립운동가 서제필의 후배로 인연이 돼 한때 그의 비서가 되었던 임창영은 1960년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서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유엔대사로 임명되었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100여명의 대표단을 인솔하고 총회장에 나타나 구두를 벗어들고 책상을 쳤던 바로 그시절이었다.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상정을 놓고 혼란을 겪었던 시기였으나 재직 1년도 채 안되어 5.16 쿠데타가 발생하자 현지에서 사표를 내고 교수생활로 들어갔다. 뉴욕주립대 뉴팔츠 캠퍼스 교수 시절 그는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반정부 투쟁에 깊이 참여했다. 그의 비판은 전직 유엔대사라는 비중 때문에 미
국 여론에 잘 먹혀 들어갔다. 그의 민주화 투쟁은 70년대 중반 통일문제로 연결됐고 이때 비밀속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이승만에 이은 두번째 한인 프린스턴대 박사로 해방전 뉴욕한인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1990년 11월24일 서재필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임창영 전 유엔대사 부부와필자
■ 제1공화국 출범
해방후 미군정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1948년 5월10일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에앞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조국의 분단을 고착시켜 통일이 늦어질수 있다는 우려에서 김구, 김규식등이 4월19일부터 3일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김두봉등과 연석회의를 통해 남북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결렬되었다. 이어5월31일 한국최초의 국회가 개원됐고 제헌국회에 의해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 조직법이 공포되었다.
7월20일 국회에서 실시한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당선됐다. 숨가쁜 일정으로 7월24일 정부통령 취임식을 갖고 8월4일 초대 이범석 내각이 구성됐다. 국회에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8월15일 중앙청에서 해방 3주년을 맞아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9월9일 김일성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선포되고 수상에 김일성, 부수상에 박헌영, 김책, 홍명희가 선임되었다.
▲중앙청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수립식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