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싱가포르 앞바다에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보면 거대한 코끼리 떼 속을 쥐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 같다. 경기 침체로 무역이 줄어드는 바람에 사상 최대 규모의 화물선단이 세계에서 가장 바쁜 항구 앞에 한가하게 모여 있다. 세계 곳곳에서 경기 회복 조짐이 보이고 있지만 여기에는 별로 없다. 일부는 130척의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무거운 30만톤 급을 위시해 수백 척의 화물선단이 물에 떠 있다기보다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물을 가득 실었을 때 수면 아래 가라 앉아 있을 방향타가 수면 위 몇 피트 위로 드러나 있다.
불황으로 무역량 급감, 할일 없는 배 급증
경기 회복 기다리며 화물선 아시아로 몰려
영국 로이드사의 AIS 실시간 선박 조사 서비스에 따르면 735척에 달하는 엄청난 배들이 모여 있어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싱가포르 앞바다에 해상 충돌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유례없는 세계 무역량 감소에 있다.
중국은 4월 수출이 전년에 비해 22.6% 감소했다고 밝혔고 필리핀은 3월 수출이 30.9% 줄었다고 발표했다. 미국 3월 수출은 2.4% 감소했다. 미 무역 대표부 대표인 론 커크는 “3월 수치는 세계 경제가 안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고 말했다.
더 걱정스런 것은 월가의 반등과 미국 내 실업자 증가의 둔화 등 긍정적인 신호에도 불구하고 무역량이 단기간에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라이더 시스템에서 컨테이너 담당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크리스 우드워드는 “소매 시즌 오더는 대부분 이미 들어왔는데 예년에 비해 약하다”고 말했다.
주택가와 주가 하락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방 소비자들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수입품에 돈을 쓸 여유가 없다고 IMF 아태 담당 부소장인 조수아 펠먼은 말한다. 그는 “무역이 늘어나려면 수요가 늘어나야 하는데 당분간 그럴 조짐은 없다”고 말했다.
H. 클락슨 사에 따르면 선박 운송 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으면서 철광을 나르는 대형 화물선 하루 임대비용은 지난여름 30만달러에서 올 초 1만달러로 떨어졌다. 지난 수 주 간 2만5,000달러 선으로 회복되고 몇몇 배들은 싱가포르를 떠났다. 그러나 선주들은 이번 회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철강업자들이 다음 달 가격 인상을 우려해 일찍 철광을 수입한 것이 반영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수송도 미미한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매우 침체된 상태다. 빈 채로 들어오는 화물선 수는 오히려 늘고 있다. 40피트 규모의 강철 컨테이너에 화물을 가득 실어 중국 남부에서 북부 유럽까지 실어 나르는 비용은 1년 전 1,400달러에서 올 초 150달러까지 떨어졌다. 지금은 300달러 선까지 회복했지만 이 정도로는 경비도 안 빠진다고 런던에 본부를 둔 드루리 선박 운송 컨설팅 사의 닐 데커는 말한다.
작년 8개의 군소 운송업체가 파산했고 올 중에 최소 1개의 대형 회사가 문을 닫을 것으로 그는 전망했다.
배들은 폭풍이 적고 수리 시설이 잘 돼 있으며 기름 값이 싸며 화물량이 많은 아시아에 가까운 싱가포르로 몰리고 있다. 로이드 레지스터-페어플레이의 크리스토퍼 폴슨은 이처럼 많은 배들이 모인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선박 운송 업계 불황 이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세계 선박 수는 80년대 초 이후 두 배로 증가했기 때문에 현재 싱가포르 인근 해역에 정박한 배의 톤수는 아마 사상 최고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세계 선박에 대한 자료가 구체적으로 작성된 것은 5년밖에 안 된다.
AIS에 따르면 이들 선박의 총 톤수는 4,100만톤이다. 이는 세계 1차 대전 직후 세계 전체 상선 톤수와 맞먹는 수치며 현재 전 세계 선박 톤수의 4%에 이른다. 투자 펀드들은 지난 5년간 수십억 달러를 들여 화물선을 산 후 이를 1년씩 리스 해 왔다. 리스 기간이 끝나 선박이 돌아오면 이들 투자 펀드와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주로 유럽 은행들의 손실은 엄청날 것이라고 파리에 본부를 둔 AXS 머린의 스티븐 플레처는 말했다.
전에는 노르웨이 등 북구 연안에 정박하던 배들도 환경 규제가 까다로워지자 남쪽으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안전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식물은 따뜻한 곳에서 잘 자란다. 홍콩에 본부를 둔 와콩 해양 운송의 책임자인 팀 헉슬리는 “배 바닥에 정원이 생기며 이는 스피드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화물선 하나는 이 때문에 최근 소말리아 인근에서 해적선을 따돌리지 못하고 잡힐 뻔 했다. 이 화물선에는 91발의 총알구멍이 나 있다. 다른 배 하나는 작년 12월 복잡한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턴을 하다 화학 물질을 실은 배와 충돌했다. 양쪽 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싱가포르 항구 책임자인 M. 시거는 많은 배들이 항구 바로 앞에 정박, 항구 정박료를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당국은 지난 2주간 국제법을 어기고 선박 노선에 정박한 10~15척의 배에 행정 조치를 취했다.
지브롤터 인근에는 150척, 로테르담 300척등 다른 항구에도 기다리는 배들이 많다. 그러나 싱가포르 인근에 단연 많다. 클락슨 사의 마틴 스탑포드는 “회복을 기다리며 아시아로 배가 몰리는 것은 아시아가 무역의 중심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 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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