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난 소용돌이 속에 첫 촛불 켠 SF여래사
행복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없는 것이며, 임금이 백성에게 나누어줄 수도 없는 것이며, 자식이 부모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형제간에도 서로 나누어줄 수 없는…
앞으로는 여래사가 여러분의 자손과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온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량으로 변하여야…
-돌고도는 인연의 수레바퀴
일제하 급성장한 대처승 제도로
한국불교는 해방뒤 더큰 혼란에
한세대 걸친 정화운동 가닥잡자
신군부는 정화 미명하에 법난을
탄압피해 설조 스님은 미국으로
덕분에 북가주서 첫예불 여래사
내년초 샌브루노 도량으로 이사
약 100년 전, 푸석푸석 몇가닥 지푸라기만 남은 꼴인 조선을 병합한 군국주의 신흥국가 일본은 ‘과거의 스승민족’인 한민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갖가지 음험한 시책을 폈다. 그중 하나, 독신수행기풍이 확립된 불교계를 대처승들이 주도하도록 바람을 불어넣고 풍로질을 해주는 것이었다. 제도적 지원도 잇따랐다.
개인적으로는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할지언정 공식으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함)을 국시로 내건 조선의 통치(자들) 때문에, 조선 500년동안 일상불교에서 산중불교로 내몰림을 당한 불교계로서는 유교왕정 조선의 쇠퇴로 도리어 정체성 혼란기를 맞는 운명의 장난같은 현실에 봉착하게 됐다.
일제의 노림수는 적이 효과를 발휘했다. 1945년 8월15일, 일제는 연합국에 굴복하고 한반도에서도 쫓겨났지만 일제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교계에 남긴 어두운 유산은 청산되지 않았다. 금오 효봉 청담 월하 구산 지효 등 선지식들이 앞장선 한국불교정화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한매듭을 지을 수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한국불교가 조계종 중심으로 큰 줄기를 잡고 한반도 불교전래 1700년 역사의 맥이 관통하게 된 것은 해방후 2,30년동안 갖은 풍파 속에서 펼쳐진 이 정화운동 덕분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이 운동의 탯줄이면서 옥동자요, 씨앗이면서 열매인 셈이다. 그런데 이 운동이 당대의 원로급 선지식들 노력만으로 이뤄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선지식들의 서원에 서원을 더하고 선지식들의 행동에 행동을 곱하며 오롯이 함께한 무수한 용맹후학들이 아니었다면….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회주인 설조 큰스님이 그 용맹후학 중 한명이다. 멀리는 일제하부터 가까이는 해방공간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불교 바로세우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원로 선지식들의 뜻을 받들어 설조 큰스님은 고산 월성 월주 월탄 등 오늘날 큰스님이 된 다른 젊은 수행자들과 함께 ‘행동하는 젊은 피’로 활약했다. 청정도인 금오 선사 입적 40주기인 이번 10월을 맞아 한국에서 금오 스님과 불교정화운동이란 제목으로 2권짜리 책이 발간되고, 거기에서 설조 큰스님 등의 회고담이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은 당연이요 필연이다.
주마가편(走馬加鞭,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함)인가 기자불립(企者不立, 꼿발로는 오래 서 있을 수 없음)인가. 불교탄압 조선왕조가 쇠망하면서 도리어 불교가 위기를 맞은 것처럼, 한세대에 걸친 지난한 노력끝에 겨우 주춧돌을 놓고 대들보를 얹힌 한국불교는 몇년 뒤 더 큰 된서리를 맞는다. 1980년 10월27일 법난(法難)이다.
운명의 장난같은 현실은 여기서도 몇소절 희한한 풍경을 남겼다. 금오 등 선지식들과 설조 등 용맹후학들이 불교정화를 기치로 어렵사리 세워놓은 한국불교를, 전두환 신군부는 하필이면 불교정화란 미명하에 짓밟은 것이 그 첫째다. 10/27 법난을 주도한 실무총책이었던 노태우 당시 보안사령관이 서슬퍼런 그때건 병상에 드러누운 지금이건 독실한 불자를 자처한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또 있다. 전두환은 후임대통령인 노태우에 의해 다름아닌 불교고찰 백담사로 유배되고 거기서 불법에 귀의해 새 생명을 얻었다
고 하니….
시간을 다시 거슬러 10/27 법난의 새벽. 신군부가 들이닥치기 직전 산문을 벗어난 설조 스님은 그날 새벽 미국행에 오른다. 자의반타의반 그의 유배는 원음(圓音, 원만한 깨달음의 소리 혹은 지혜와 자비가 구족한 소리. SF여래사의 주간소식지 이름이기도 하다)에 목마른 베이지역 한인 불자들에게는 축복이었다. 여래사의 불씨는 그렇게 날아와 그렇게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꼬박 28년이 흘렀다.
돌고도는 세상은 설조 큰스님이 북가주 어느 산중에 홀로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았다. 더러 다른 길을 간 도반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28년 전 가을 된서리를 맞았던 용맹후학 도반들이 하나둘 한국불교의 중심에 다시 섰다. 북가주의 은자 설조 큰스님도 수차례 부름을 받았다. 2000년 뉴밀레니엄을 앞두고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후보로 오르내리고, 대한민국 대표사찰 불국사의 주지 소임을 맡는 등 종단의 큰 일꾼으로 활약했다.
SF여래사는 여래사대로 착실하게 성장했다. 종단의 대소사 때문에 한국과 미국을 바삐 오가야 하는 설조 큰스님의 빈자리를 1991년에 온 수원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아 대신하고 있다. 새크라멘토에 형제도량(SAC여래사)을 잉태하고 산간지역 오컴에 자매선원(여래사선원)을 분만했다.
SF여래사가 새 도약을 위한 날갯짓이 한창인 가운데 지난 26일(일) 개원 28주년 법회를 가졌다. 내년초 쯤 샌브루노의 새 도량으로 이사를 갈 참인 여래사가 SF도량에서 치르는 마지막 개원법회였다. 삼귀의 찬불가 등에 이어 법상에 오른 설조 큰스님은 특별법문을 통해
28년 전 그날 새벽의 미국행을 회고하면서 그 어떤 분노나 원망을 뒤적이는 것보다는 한국에 남아 고초를 겪은 다른 스님들에게 미안하다고 운을 뗀 뒤 이 도량이 인연되어…오늘에 이르게 된 것을 위로 부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면서도 훌륭한 다른 스님과 인연이 되었더라면 더 큰 지혜와 자비로 교화를 받으셨을 터인데 둔한 산인으로 인하여 그간 많은 손해를 감내하셨다고 자신을 낮췄다.
경전과 참선에 밝지 못했는데 여러분에게 전해드릴 말씀을 준비하느라 이 산인이 도리어 많이 배우게 됐다고 신도들에게 감사를 돌린 설조 큰스님은 행복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짓는 것이라는 행복론을 다양한 사례를 곁들여 설파했다. 큰스님은 이어 인도에서 생긴 불교가 중국 등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은 인도 스님네들이 (인도사람만 말고) 중국상인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전법을 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는 여래사가 여러분의 자손과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온 이웃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량으로 변하여야 한다는 희망을 새 방향타로 제시했다.
<정태수 기자> tsjeong@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