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1년.지금은 교회개혁의 때.
가을은 종교개혁의 때다. 올해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1년째다. 그해 10월 31일, 드높던 교회의 담장을 넘어 울려 퍼졌던 말씀의 그 목소리가 오늘 교회를 흔들고 있다. 지금은 교회개혁의 때다.
가정이 위협받고 있다. 이미 상처로 만신창이 되었다. 온몸으로 이 위협의 칼날을 막아서지 못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옷만 갈아입는 변화가 아니라 말씀의 쟁깃날로 마음을 갈아엎는 진정한 회개와 돌이킴의 변화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다. 그들이 각각 부모를 떠나 아름답게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이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고, 각각 새로운 가정을 이룰 꿈을 꾸며 성장한다. 이렇게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그 자리를 이어간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가 가정을 이루자는 세상이다. 여자도 남자 없이 결혼할 수 있게 하자는 발상이다. 놀람과 충격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정상적인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그런데 매일 새벽 따끈한 커피와 함께 대하는 뉴스는 미국의 일부 주에서 (그것도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하여!) 그것이 이미 합법화 되었고, 앞으로 그 파급속도는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런 소식을 듣고 집을 나서서 아직도 어둔 고속도로를 달린다. 차 안에서 아이들의 진학 문제를 걱정하고 어렵게 전개되어 가는 경제를 나름대로 전망한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새벽에 읽고 들은 그 불편한 뉴스는 일상생활로 스며든 셈이 되었고, 놀라고 분개하던 사람들은 거리를 떠나 집안으로 자기 그림자를 잡아끌어 들이고 말 것이다. 분개하면서도 우울한 얼굴로 방황하던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는 그런 점에서 한산해지고, 대신 유모차를 밀고 가는 동성부부의 뒷모습을 스케치한 몇 장의 그림이 남을 것이다.
교회가 걱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주 방문하는 새 가족 관리와 주차 공간 확보를 위한 캠페인이 뜨겁다. 주보에 게재된 지난주 헌금과 주일예배 프로젝터 오타에 이맛살 찌푸리는 동안 어느덧 예배는 끝난다. 자동적으로 친교실 식탁 위에 수저가 놓인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의 예민한 페이지를 건너뛴다. 차라리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집을 살 수 있는가, 어떤 태도가 긍정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효과적인가, 늘 웃으며 사는 방법은 없는가? 그런 세속화된 복음에 조명을 집중한다. 영적 평강보다는 육체가 우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역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사업이 주된 대화다. 이런 교회가 가정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장래를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기도가 있는가?
소수민족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적 소수계에 속한 그들을 지지함으로써 동맹체제를 구축하잔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지혜롭다는 말이다. 주로 좋은 대학에서 공부한 소위 엘리트들이 모여 내린 결론이다. 이제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사람을 이롭게 하자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기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때와 장소에 따라 몸을 바꾸는 파충류의 일종이다. 정치가는 누구인가? 사람은 먼저 가치를 생각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치는 가치 다음에 오는 논의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정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괴물이며, 정치가는 그 앞에 깃발 높이 든 무리다.
재독 사회철학자 송두율의 정치적 판단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을 말도 있다. 그는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2000)에서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행세식 진보주의자”보다 더 좋아한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진정한 보수주의는 지킬 것을 지키는 “가치보수주의”(Wert-konservativismus)지, 어떤 식으로든 굴러 들어온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안정”을 추구하거나, 이해타산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외치는 “보수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 눈 팔지 않고 보수적 가치체계를 추구하며, 이론을 열심히 확장해 나가는 보수주의자가 ‘진보’나 ‘해방’을 내세우면서 이론에 대한 책임과 이를 위한 실천에 진지함을 보이지 않는 ‘좌파상업주의’보다는 분명히 값진 것이다”(171-172 페이지). 그의 통찰을 오늘 교회에 적용할 수 있을까? 믿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보수주의적 진지함이 진보주의적 무책임보다 낫다. 그가 말한 “가치”는 물론 “타협점”이 아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으로 푼다.
오늘의 교회를 걱정한다. 마틴 루터가 “면죄부”를 주로 반대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교회 문에 걸고 포문을 열었던 “교회개혁”의 목소리가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대개 교회 문은 안으로 굳게 잠겼으며, 누가 더 큰 파이를 나누게 될 것인가 거기 혈안이다. 그때는 돈 있는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었다면, 지금은 정치집단에게 주고 있다. 교회는 침묵으로써 “무죄”를 선포하며, 한켠에 물러나 앉아 정치거래의 남은 부스러기를 기대하고 있다.
보라. 말씀은 터뜨려 내는 힘이요 능력이다. 허무와 절망을 깨뜨려 버리고, 혼돈과 공허를 끝장내는 창조의 역사다(창세기 1:1-2). 말씀의 능력은 교회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간다. 마른 들판에 강물을 이끌어 낸다. 세상은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다. 분명하다. 개혁 대상은 정치화된 교권이요, 그런 흐름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임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표를 얻자는 것이요, 정치 중에도 타락한 정치다. 교회 안에 뿌리박은 정치와 정치인이 개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보자. 교회가 말씀공부가 아니라 행사에 행사로 분주하고, 교회가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번뜩이는 세속 경영마인드를 주목한다면, 오늘이 바로 교회개혁의 때다.
어떤 성경공부는 기도가 없다. 거기는 논리의 섬광이 번뜩일 뿐, 감동이 없다. ‘이해’시키는 데 열중한 나머지, 모두 자기 입장의 변호사가 되었다. 여기는 진실보다는 논리적 타당성에 힘이 실어준다. 그들은 성경에서 오히려 동성애의 근거를 찾아낸다. 세상에! 아전인수(我田引水)다. 억지놀음이다. 신성모독이다. 소돔성의 파국을 자초한다.
어떤 성경공부는 놀랍게도 말씀이 없다. 뜨거운 격정 속에 세미한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부르짖고 외치고 몸을 상하게 하지만, 바람과 불과 지진이 지나간 후에 들리는 그 음성(열왕기상 19:12)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 수가 적다. 진정한 변화는 말씀이 주도하며, 우리는 순종뿐이다.
무릎을 맞댄 깊은 간구가 있어야 한다. 신앙의 “보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히브리서 12:1)이 성경의 행간에 그 얼굴을 보인다. 그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당신은 보수주의자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어내셨다. 천지창조의 정점에 인간창조가 있다. 인간창조는 가정창조가 결론이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의 아름다운 결합이다. 생각하라. 하나님을 반대하고 일어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아니고는 죄 사함이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조하신 사실을 지적하셨다.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태복음 19:6). 동성결합은 죄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심을 부정한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경계를 허문다. 불순종의 죄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죄다. 교회는 동성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살인, 간음, 도적질 같은 죄를 미워하듯 동성애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교회는 교회 안의 사람들의 죄를 눈감아 주지 않듯, 교회 밖에 선 사람들의 죄도 지적한다.
언제부터 교회가 세상을 추종했는가?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스른다. 가파른 강줄기는 물론 폭포도 타고 오른다. 장마 비 때 마당에 떨어져 퍼덕이는 미꾸라지를 보라. 주님의 명령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 21:22하).
교회는 프로포지션 8을 찬성한다. 그걸로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적 불이익 앞에 취약한 소수민족 문제는 정치로 풀 수 없다. 아쉽지만 대개의 인간 정치는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 적어도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의 편에 서신다. 하나님께서 위기의 한반도를 식민과 침략의 손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서 한민족의 미래를 책임지신다. 인간의 이기심의 극대화를 꿈꾸는 한 정치는 죄악이다. 정치적 모색에서 난 그 어떤 제도화도 말씀의 빛에 재검토 되어야 한다. 동성애 결혼은 합법화 될 수 없다. 그 합법화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다면 교회는 그 결과에서 난 책임을 져야 한다.
얼마 전 한국일보에 소개된 어떤 프랑스인의 말이다: “어떤 사람은 길을 찾고, 어떤 사람은 구실을 찾는다.” 교회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는 길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곧 길이시다. 세상에 묻지 말고 주님께 여쭈어야 한다.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무릎으로 기도하며 전진해야 한다. 구실이라면 합법화 된 죄악과 더불어 살아남는 비겁한 자기변명 아닌가.
교회는 세속적 생각을 멈추고 영적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교회는 제도 속에 자리를 펼치지 말고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교회는 그 철문을 걸어 잠그지 말고 벽을 허물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정치가 아니라 목회여야 한다. 목회는 목양이다. 목양은 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목자의 사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말씀의 능력은 강물처럼 우리를 굴린다. 날마다 말씀 안에서 뒹굴고 돌면서 오늘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버려야 한다. 기득권 때문에 비겁해진다면 그걸 내려놓아야 한다.
찬바람 부는 베이 지역 높은 언덕에 서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바람처럼 다가오시는 주님 앞에 고개를 든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2:19). 여기서 회개의 눈물이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예레미야 1:10). 여기서 사명자의 눈에 빛이 뿜어져 나온다.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소식을 전한다. 마라톤 전투 소식을 전하던 병사처럼, 오늘 우리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비대해진 몸을 줄여야 한다. 지닌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달려가야 한다. 달리는 교회. 시대를 앞서 달려가면서,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교회. 세상이 교회를 따라오게 해야 한다. 말씀의 개혁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세속적 방식, 구실로 도피하는 방식,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세워 올렸던 바벨탑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려야 한다. 새로운 말씀의 나라를 건설하며 심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사명이다.
마귀의 위협에 겁내지 말아야 한다. 마귀는 그저 잠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그는 우리를 상처 내겠지만, 그게 전부다. 한 열흘쯤(계시록 2:10)? 한 천 이백 육십일 쯤(계시록 12:6)? 그렇지만 그게 전부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질서를 파괴하는 어떤 정치도 그 생명은 그게 전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아프다. 괴롭다. 슬프다. 읽는 것이 고통이며, 듣는 것이 허무다. 학교로 집 문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 보며 걱정이다. 가게 문을 열며 움찔한다. 혼돈과 공허함, 절망과 신음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다. 웃는 이들의 얼굴이 보이지만 그걸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물어보자.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 말고 다른 소망이 있는가?
남자는 남자다. 여자는 여자다. 사람은 사람이며, 동물은 동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생명의 경계다. 이 경계를 지켜내는 삶이 거룩이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세속적 흐름에서 한 걸음 물러난 거룩한 교회가 이 상처 난 시대를 치유하고, 방황하는 세대를 이끌어갈 사명을 감당한다. 그렇다. 오늘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말씀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믿는다. 우리는 “말씀의 가치”를 지켜내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다. 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주님 앞으로 달려가는 교회개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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