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공적자금 투입..또다른 `공룡’ 출현
(워싱턴=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미국 달러화는 국제 간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기축통화다.
글로벌 경제가 기축통화인 달러화에 계속 의존하는 한 `주식회사 미국’이 부도가 날 가능성은 없다.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더라도 달러화를 찍어내 적자를 메우면 되기 때문이다.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하는 이번 월스트리트발(發) 금융위기 때 전 세계 증시가 동반 폭락양상을 보이는 중에도 가격이 급등한 것은 금과 같은 실물자산과 함께 미국의 국채였다.
뉴욕 증시가 순식간에 녹아내릴 듯한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주식회사 미국’의 주식인 국채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기현상을 보인 것이다.
이는 뉴욕 증시의 뒤에 달러화의 발권력을 보유한 미국 정부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는 인식, 혹은 뉴욕 증시와 함께 세계 증시가 붕괴하더라도 미국은 끄떡없이 버틸 것이라는 믿음에서 전 세계 투자자들이 앞다퉈 미국 국채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대공황을 시작으로 1970년대 오일쇼크, 1989년 저축대부조합의 부실, 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 2000년대 초 닷컴 버블(거품)의 붕괴, 2001년 9ㆍ11 테러 등 크고 작은 금융위기 때마다 미국 정부는 신속하고도 강도높게 시장개입을 단행했으며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실패한 적이 없다.
다만 개입에 따른 후유증만 남겼을 뿐, 달러의 발권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미국 정부의 시장 개입이 실패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미 정부가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등 전례없는 강도로 시장개입에 나서고 있다.
이미 올해 들어서만 5천억 달러 이상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앞으로 이 규모는 1조 달러(한화 약 1천조 원)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올해 3월 미국내 5위 투자은행(IB)인 베어스턴스가 유동성 위기에 몰리자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전면에 나서서 베어스턴스를 JP모건체이스 은행에 `강제 결혼’시켰다. 미 정부는 JP모건체이스에 대해서는 290억 달러의 공적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일부에서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됐으나 시장 안정을 위해 미 정부는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무부는 이달 들어서는 양대 국책 모기지 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해 최대 2천억 달러의 공적자금 지원을 통한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성격상 공기업이지만 주식지분은 전량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기형적 구조였지만, 이번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재무부가 주인이 됐다.
미국내 최대 보험사인 AIG에 대해서는 FRB가 850억 달러의 크레디트라인(신용공여 한도)을 2년 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 회사 지분 79.9%를 인수했다. 미 중앙은행이 최대 보험사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는 조치였다.
미국의 3, 4위 IB인 메릴린치와 리먼브러더스는 미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순식간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월가의 주요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스스로를 `리먼의 친구’로 자처하면서 유동성(자금 조달) 위기에 빠진 리먼브러더스의 회생을 위해 정부가 나서 줄 것을 호소했다.
158년 전통을 자랑하는 리먼브러더스가 평소 월가에서 구축한 탄탄한 네트워크로 인해 정부가 이런 호소에 귀를 기울일 법도 했지만 정부의 방침은 단호하게 `NO’였다. 결국 리먼브러더스는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다.
세계 최대의 증권사인 메릴린치는 리먼브러더스만큼이나 자금난이 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무부가 리먼브러더스의 구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매각되는 운명을 택했다.
미 금융산업의 지형도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윤곽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양상이다. 미 금융산업의 위기 탈출 시나리오는 `3인의 손’에서 그려지고 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벤 버냉키 FRB 의장, 티모시 가이스너 뉴욕 연방은행 총재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크리스토퍼 콕스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과 함께 최근에는 거의 매일 대책을 숙의하며 시장 개입을 단행하고 있다.
한국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자아낼 만큼 이들의 시장개입은 공공연하다.
AIG에 대해 85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결정하기 전까지 재무부와 FRB는 JP모건체이스와 골드만삭스를 동원해 AIG에 브리지론(비담보 긴급 신용대출)을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도 했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하기 직전에 바클레이즈와 BOA가 인수협상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미 금융당국의 주선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의 외환은행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매각토록 정부 당국자들이 재가를 내린 것 때문에 훗날 고위공무원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ㆍ구속되고 재판까지 받았던 일과 비교하면 미국 정부의 시장개입은 노골적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다.
이는 그만큼 시장상황이 다급함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시장 자율에 맡겨 대형 금융회사를 파산하도록 내버려 둬 그 충격파가 경제전반에 미치도록 하는 것보다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파국을 막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면 신속하게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미국 정부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는 11월 대통령선거라는 정치적 변수는 아무런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
1990년대 초 거품경제의 붕괴로 일본의 금융회사들이 심각한 부실에 빠졌을 때 일본 정부가 부실채권 정리를 계속 미룬 데다 오히려 부실을 은폐하도록 부추긴 끝에 결국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불황을 초래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미국의 시장개입은 원칙을 잃은 행보이며 더 심한 모럴 해저드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리먼의 구제요청은 거부했지만 덩치가 좀 더 크다는 이유로 AIG는 살렸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재연될 금융위기 때마다 미국 정부가 계속 이런 식의 개입을 단행할 것인가를 놓고도 뜨거운 논쟁이 예상된다.
그러나 시장의 파국은 막아야겠다는 입장은 확고불변하기 때문에 주변의 어떠한 비판에도 개의치 않고 미국 정부는 과감한 시장개입을 주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장이 안정되고 나면 유사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고강도의 금융산업 규제ㆍ감독 시스템을 구축할 것으로 보여 앞으로 세계 금융시장에서 미국 재무부와 FRB, 그리고 금융감독기구의 역할과 위상은 유례없이 강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시장 불안을 막기 위해 799개 금융주에 대해 한시적 공매도 금지조치까지 내렸다.
위세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미국 금융정책 당국이라는 또다른 `공룡’의 출현이 눈 앞에 다가왔다.
s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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