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전 찍은 가족사진. 캠페인 블로그를 작성하는 메간, 방글라데시에서 입양한 브리젯, 해병대에 입대한 짐, 해군사관학교 생도 잭.
1973년 생환한 매케인이 닉슨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베트남 포로생활‘전쟁영웅’
해군 4성 제독 가문의 말썽꾸러기
신디와 재혼 후 연방의회에 입성
해군 4성장성의 아들및 손자. 베트남전 영웅, 연방하원을 거쳐 상원진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라는 화려한 정치 인생으로 비쳐지는 존 매케인. 그러나 그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인간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한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LA타임스가 4일 보도한 매케인 특집을 정리했다.
■해군 집안 말썽꾸러기
존 시드니 매케인 3세는 1936년 8월29일 파나마 운하 통치구역(PCZ)에서 해군 가문에 태어났다. 부친과 조부가 미국 유일의 부자 4성 제독으로 매케인도 1954년 해군 사관학교로 진학했다. 매케인은 사관학교에서 “건방지고 규율이 없는 생도”였다고 시인했다. 전교에서 거의 꼴찌로 졸업했으나 생도들 가운데서는 인기가 높았다. 그의 룸메이트였던 잭 디트릭은 “존과 단지 같이 사는 것도 모험”이었다고 회상했다.
매케인은 1958년 졸업한 뒤 해군 조종사가 된 후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브라질 패션 모델과 사랑에 빠지고 메리라는 이름의 스트리퍼와 연애를 한 적도 있었다. 한번은 스페인에서 뽐내려고 너무 낮게 비행하는 바람에 전신주들을 무너뜨린 적이 있고 또 비행기 2대를 박살낸 바 있다.
1936년 태어난 존 매케인이 4성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에 안겨 역시 4성 장군인 아버지(왼쪽)와 찍은 사진.
■베트남전 영웅
매케인은 1967년 10월26일 하노이에 있는 발전소를 폭격하러 출동했다가 일생이 바뀌게 되었다. 매케인은 지대공 미사일이 그의 비행기에 조준됐다는 알람이 울리자 먼저 폭탄을 투하한 다음에 미사일을 피하려고 시도했다. 미사일은 기체의 오른쪽 날개에 명중하고 말았다. 매케인은 격추된 비행기에서 다행히 탈출했으나 하노이 중심 호수에 착륙, 다리와 두 팔이 부러졌다. 그를 건져낸 적군은 그의 발목에 총검을 찔렀다.
북베트남은 생포된 포로가 유명한 미국 해군 제독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됐다. 1968년 매케인의 아버지는 태평양 지구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베트남전을 수행하는 책임자였다. 호아 로 감옥에 독방 감금된 매케인은 아버지의 지위 때문에 아마 목숨을 건졌지만 고문과 극심한 고난을 겪게 됐다.
포로가 된지 9개월 후인 1968년 7월 부상과 이질로 허약해진 매케인은 북베트남으로부터 집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미군 행동수칙은 포로가 생포된 날짜순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매케인은 자신이 석방될 경우 북베트남의 선전거리가 되고 다른 포로의 사기를 저하할 것이라고 판단, 북베트남의 제의를 거부했다. 매케인의 결정은 북베트남을 격노하게 했다. 매케인은 간수들이 “이제 상황이 매우 안 좋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회상했다.
과연 그랬다. 1968년 8월말 간수들이 그를 데리러 왔다. 그는 머리를 무릎 사이로 한 채 줄로 묶여 며칠째 두들겨 맞았다.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한 매케인은 나흘째에 마침내 꺾였다.
다른 모든 미군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매케인도 미국을 비난하는 ‘자백’에 서명하고 녹음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시커먼 범죄자다. 항공 해적의 짓을 했다. 거의 죽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내 생명을 구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수술을 의사들이 해줬다”는 그의 ‘자백’이 다른 포로들에게 방송됐다.
매케인은 그 때 모든 자부심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또는 경멸스럽게만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자백이 공개돼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장면을 계속 상상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그러나 그 경험이 건방졌던 자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1967년10월26일 하노이 폭격에 나섰던 매케인의 비행기가 격추됐다. 호수에 빠진 매케인을 베트남 민간인들이 구해내고 있다.
■신디 헨슬리
매케인이 1973년 베트남에서 돌아와 캐롤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둘 모두 힘든 고난을 겪은 상태였다. 캐롤은 196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통사고를 당해 양 다리와 골반이 부러지고 심한 내상을 입었다. 한 때 모델이었던 캐롤은 수많은 수술을 거치는 과정에서 키가 몇 인치 작아지고 체중도 늘어난 상태였다.
매케인 전기를 저술한 로버트 팀버그에 따르면, 매케인은 플로리다에서 복무하는 동안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9년 4월 하와이에서 신디 루 헨슬리를 처음 만난 매케인은 곧 그녀와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42세였던 매케인은 캐롤과 별거하고 있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으나 이혼신청서에 따르면, 매케인은 1980년 1월까지 캐롤과 같이 살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매케인은 결혼이 무너진 책임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베트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과 미성숙 때문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1980년 신디와 결혼하고 애리조나에 정착한 매케인은 1982년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됐는데 장인의 도움이 컸다.
1982년 애리조나 메사에서 연방 하원의원 도전한 매케인이 부인 신디와 선거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이 선거에서 당선한 매케인은 의정생활을 시작한다.
백악관 향한‘마지막 진군’
최악 위기‘링컨 S&L 스캔들’ 극복 후
정치 개혁 강력 추진 ‘독불장군’ 별명
■링컨 S&L 스캔들
1986년 애리조나 상원의원에 당선된 매케인은 자신이 경험한 일생 최악의 사건이 베트남이 아니라 링컨 S&L(상호은행) 스캔들이었다고 말한다. 매케인이 애리조나에서 정계 진출하는데 일찍이 도움을 준 사람 중 하나가 찰스 H. 키팅이었다. 링컨 S&L의 키팅은 매케인의 캠페인에 10만달러를 기부했고 바하마에 있는 그의 별장에 자주 초대했다.
연방 단속자들은 링컨 S&L의 수상한 대출 관행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하자 키팅은 매케인 등 자신이 도운 상원의원 5명에게 도움을 청했다. 매케인은 키팅의 부탁을 받고 단속기관 관계자들과 2차례 만났다. 매케인은 단지 정보를 구하기 위해 단속자들과 만났다는 입장이지만 단속 수사관의 견해로 보면 키팅을 위해 쉽게 나가달라는 압력이었다.
링컨 S&L은 곧 붕괴돼 납세자들에게 26억달러의 손실을 가져온 대형 스캔들이 됐다. 1991년 매케인을 포함한 상원의원 5명, 소위 ‘키팅 5’는 상원 윤리위원회로부터 문책을 받았다.
정치 생명이 끝나는 위기에 처했으나 매케인은 다행히 1991년 걸프전이 터지는 바람에 극복할 수 있었다. 군인 경력 덕택에 매케인은 걸프전동안 사실상 상원 대변인으로 두각을 나타내 키팅 5는 거의 잊혀지고 1992년 재선에서 낙승했다.
매케인은 그러나 명예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숨김없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공개하고 투명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이와 함께 정치 개혁을 추진한 매케인은 그런 과정에서 공화당과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 “독불장군 ”(maverick)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독불장군
2002년 기업이 기부할 수 있는 정치헌금을 제한하는 선거개혁 법안을 통과시키 위해 민주당과 협력, 법안이 공화당에 불리하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긴 많은 공화당원들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또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개헌안을 반대하는 한편 줄기세포연구를 지지하고 차량 연료효율성 기준을 강화하는 법안을 지지했으며 불법체류자들에 사면의 길을 열어주는 이민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협력했다.
매케인은 또 특정 선거구의 이익을 위한 불필요한 정부 지원 ‘포크 배럴’에 전쟁을 선포, 양당 동료 의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1990년대 중반에는 존 케리 상원의원과 협력해 베트남에서 실종된 군인들과 전사자 유해를 찾기 위한 외교 캠페인을 추진해 베트남과 외교를 시작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존 케리 상원의원과 베트남 문제로 이견을 보이곤 했으나 1990년대에는 다시 관계가 정상화 됐다.
■정치적 변신
매케인은 2000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공화당내 보수 세력의 노여움을 곧 체험하기 시작했다.
부시 지지 세력은 그가 베트남전 포로 경험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사실이 아님), 흑인 사생아가 있다 (사실은 방글라데시 고아를 입양했음), 부인이 마약중독자다(허리수술 받은 후 진통제에 의존했었음) 등 악성 루머를 퍼트렸고 매케인도 보수 복음주의 세력을 “악의 세력”, “편협 앞잡이들”이라고 부르며 반박했었다. 2004년에 존 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매케인을 러닝매이트로 고려했을 정도였다.
대신 매케인은 2008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품에 돌아오기 위한 계산된 변신을 시작, 이번 선거에서는 그에게 ‘독불장군’이라는 별명을 준 독립적 언행과 정치 이념이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매케인은 부시 대통령의 세금정책을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두차례 반대했었으나 이제는 영구화할 뿐 아니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매케인은 또 연안 석유시추를 반대했었으나 지금은 지지하고 있다.
2000년 공화당 대통령 경선에 나갔던 매케인이 애리조나 세도나 밸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후보 사퇴를 발표하고 있다.
■사나운 성질
매케인은 상원의원들 가운데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하다. 오바마는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될 “기질”(temperament)을 거론, 매케인의 성격이 도마 위에 오를 가능성을 시사했다.
매케인은 회고록에서 2살이었을 때부터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한다. 군인 가족에서 자라 이사를 자주 다니고 학교 전학이 많았던 매케인은 작은 체구 때문인지 학교에서 싸울 때가 많았다. 고등학생 친구들 사이에 그는 “건방진 녀석(Punk)”, “맥내스티”라는 별명이 따랐고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존 웨인 매케인”이라고 불렸다. 워싱턴 매거진은 그를 “성마른 상원의원”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지난해에도 존 코닌 상원의원(공화-텍사스)에게 ‘f’로 시작되는 욕설을 퍼부운 적이 있고 2000년에는 제인 디 헐 애리조나 주지사가 매케인 대신 부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매케인의 폭발에 짜증이 나고 그와 전화 통화할 때에는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야 하는게 귀찮아서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우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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