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인종갈등 체험
대학 졸업 후 시카고서 빈민구제 활동
미국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 탄생을 가져온 오바마 신화는 인종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과 4년 전에 미국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오바마는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직 업적을 이룬 것도 별로 없다. 오바마는 그러나 4년 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각 인종이 화합된 사회의 이상을 제시,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의 지도자로 승화한 것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오랜 기간 어머니와 떨어져 성장한 오바마의 스토리는 인종갈등의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었다. 백인 가정에서의 성장과 흑인 사회에의 소속감 사이에서 갈등과 고립감을 느낀 오바마는 그러나 흑인과 백인 세상을 연결하는 교량 역할에서 목적의식을 찾았고 오늘날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발판이 됐다. LA타임스가 28일 보도한 기사를 토대로 오바마의 삶을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우정아 기자>
1960년대 사진에서 오바마의 모친 스탠리 앤 던햄이 어린 오바마를 안고 있다. 아랍어로 “축복받은”이라는 뜻인 버락은 1961년 8월4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는 국제결혼이 이상할 것 없는 삶의 부분이다. 그런 배경에 견주어도 오바마의 삶은 독특한 오디세이였다.
1960년대 후반 하와이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던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과 아프리카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그 대학에 등록한 케냐 유학생 버락 후세인 오바마는 사랑에 빠졌다. 양가 가족의 만류에도 결혼한 커플은 1961년 8월4일 버락 주니어가 태어나는 기쁨을 맞이했으나 2년 후 아버지가 하버드에서 경제를 공부하러 떠나면서 멀어지기 시작해 결국 이혼으로 이어졌다.
앤은 이어 인도네시아 학생 롤로 소에토로와 결혼, 1967년에 6세가 된 아들과 함께 자카르타로 남편을 따라갔다. 어린이들이 연 날리고 악어가 배회하는 자카르타에서 어린 오바마는 신나는 모험을 만끽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극빈 등 어두운 면도 있었다. 앤은 롤로와 사이가 멀어졌고 미국 대사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됐다. 오바마가 멀리 미국에서 흑인 남성이 검은 피부 껍질을 벗겨내려고 시도한 일화를 읽은 것도 바로 그곳 도서관에서였다.
앤은 인권운동에 대한 도서들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 마할리아 잭슨의 음반 등을 집에 가져오는 등 어린 오바마에게 흑인 유산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오바마가 10세가 됐을 때 앤은 그를 하와이에 있는 친정집으로 보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톨릭 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에 가서는 이슬람에 대해서도 배운 오바마는 하와이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후 스쿨에 재학했다.
■정체감 위기
오바마는 훗날 회고록 ‘내 아버지의 꿈’에서 사춘기 때 내부 갈등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흑인이 거의 없는 섬에서 자라면서 오바마는 흑인 가수 마빈 게이처럼 부르고 리처드 프라이어처럼 욕설 섞인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밤늦게까지 농구를 했고 갈등을 해소하려고 대마초도 시도해 봤다.
오바마는 1979년 LA에 있는 옥시덴탈 칼리지에 진학하면서 본토에서 더 적나라한 모습의 인종 현실을 접했다. 그는 그러나 다른 흑인 학생들이 느꼈던 분노와 소외감에 공감하지는 않았다. 오바마는 자신의 정체성이 인종에서 시작됐을지 몰라도 거기서 끝나지는 않았다고 회고록에서 강조했다. 오바마는 혼혈아로써 흑인과 백인 세계를 모두 교섭할 잠재력이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1979년 하와이에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외할머니 매들린 리 페인 던햄과 외할아버지 스탠리 아머 던햄의 축하를 받고 있다.
■전환점
1981년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전학해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21년동안 한번 밖에 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케냐로 여행할 지 어머니와 논의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그가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 오바마는 아버지가 케냐 사회를 바꾸려던 그의 꿈이 냉엄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면서 술에 의존하고 불행하게 됐다는 사실을 배운 오바마는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삶의 한 부분이 됐다고 말했다.
더 이상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고 느낀 오바마는 학업에 열중하고 매일 3마일씩 뛰며 일요일에는 금식하는 등 심신을 단련하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반성했다.
1984년까지 뉴욕 컨설턴트 회사에 취직한 오바마는 얼마 후 컨설턴트 직장을 그만두고 아는 사람도 없는 시카고로 향했다. 80년대 초 경기불황으로 실업률과 주택차압으로 황폐해진 사우스사이드의 교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를 만난 오바마는 흑인 커뮤니티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라이트 목사를 존경했다.
하버드 법대 시절 희망에 찬 오바마.
95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당선 정계 진출
2004년 전당대회 연설 계기로 연방상원 입성
■하버드 법대
그러나 사우스사이드 거리가 마약 매매, 폭력, 분노와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바마는 더 높은 정치력을 찾아 88년 하버드 법과대학에 등록했고 90년 흑인 최초로 미국 최고 권위 법학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그가 편집위원회에 더 많은 흑인과 진보주의자들을 임명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들은 곧 실망했다.
오바마의 급우이자 전 부시 행정부 변호사인 브래드포드 베렌슨은 “오바마가 분명 진보주의자였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어느 편을 든다고 느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반면 다른 학생은 “오바마의 선출이 잠깐 동안은 의미가 깊었지만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성세력이 됐다”고 실망했다.
버락 오바마가 시카고 법대에서 헌법학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후 작은 인권 법률회사에 합류하고 유권자 등록 등을 도왔다.
■미셸 오바마
오바마는 여름방학 동안 시카고로 돌아왔을 때 처음 미셸을 만났다. 미셸 라본 로빈슨은 다발성 경화증을 앓는 아버지와 함께 4가족이 사우스사이드의 1베드룸 아파트에서 살았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미셸은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독해력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흑인 대학생으로서 느낀 고립감을 졸업논문으로 삼았다. 오바마가 입학하기 바로 전인 1988년 하버드 법대를 졸업했다.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주례를 선 결혼식은 오바마의 의붓 여동생이 표현했듯이 지구촌 각처에서 각양각색의 축하객들이 모여 “무지개 부족”을 이뤘다.
버락 오바마와 미셸 로빈슨의 1992년 10월18일 결혼식 사진.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 1학년을 마친 후 시카고 기업법률회사에서 일하면서 상사인 미셸을 처음 만났다.
■정계 입문
오바마가 정치적으로 너무 부드럽고 순진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오바마는 1995년 정계에 처음 진출할 때 거침없는 모습도 보였다.
당시 일리노이 주상원에서 하이드팍을 대표하는 앨리스 팔머 의원은 연방의회에 출마하면서 오바마를 자신의 후임자로 지지했다. 그러나 팔머가 민주당 경선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재선 운동을 재개하게 됐다. 팔머는 오바마에게 물러설 것을 요청했으나 오바마는 거절했다.
팔머가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청원서를 제출하자 오바마는 그녀가 수집한 서명들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부정행위가 발견되면서 오바마는 거의 도전 없이 출마해 선출될 수 있었지만 팔머와 가까운 일부 흑인 정치 지도자들을 거슬리게 했다.
이어 오바마는 2000년 바비 러쉬가 지키고 있던 연방하원 의석에 출마, 또 다시 흑인 기성체제에 도전했다. 그러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러쉬를 지지했고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이라는 공격을 당한 오바마는 2대1의 표차로 참패했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2004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자격으로 연설하고 있다.
■연방상원의원 도전
오바마는 참패 수모에도 불구하고 꿈을 더 크게 가졌다. 2002년 주상원의원으로 재선된 오바마는 연방상원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것. 미셸이 반대했지만 오바마는 낙선할 경우 정계에서 은퇴하겠다고 약속하고 이라크 전쟁 반대를 핵심 공약으로 삼아 다시 캠페인 길에 올랐다.
오바마는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후보 가운데 3위에 머룰렀지만 운이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후보는 전 부인이 자기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주장해 사퇴했고 다른 후보는 선거자금 모금에 관한 의혹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공화당 후보가 경선에서 이긴 지 4개월 만에 후보를 사퇴했다. 일리노이 공화당은 흑인 정치인 앨런 키이스를 메릴랜드에서 급히 불러왔으나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의 인상깊은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로 종식됐다. “우린 할 수 있다”라는 구호를 내세운 오바마는 70%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상원의원 시절
오바마는 미 역사상 5번째 흑인 연방상원의원이며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 재통합 이후로는 3번째이지만 의정 활동에는 흑인 지도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2005년 카트리나 재앙 때 일부 흑인지도자들이 정부의 늑장 대응이 인종차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또 2007년 민주당내 16번째 진보주의적 상원의원으로 기록됐지만 공화당 의견에도 동참했고 존 맥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공동으로 이민법 개혁안을 상정하기도 했다.
오바마 상원의원이 2005년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과 이민 개혁안에 관해 상의하고 있다.
■인종 발언
오바마는 경선내내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과 여성대 흑인 후보로서의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해야 했다. 특히 한때 섬겼던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설교도중 “신이여 미국을 저주하소서”라고 한 발언 내용이 확산되면서 오바마는 즉각 라이트 목사를 비난했지만 파문은 계속됐다. 급기야 올 3월 그는 필라델피아 연설대에 올라 라이트 목사와 거리를 뒀다. 이에 큰 반발을 사기는 했지만 박수도 받았다. 이제는 깊은 상처만 기억나게 하는 불필요한 문제에서 대선 캠페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라이트 목사를 버릴 때가 됐다. 캠페인을 승리로 이끌려면 인종 역류를 피해야만 한다.
2005년 시키고 트리니티 연합예수교회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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