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통신원과 함께 한 사무엘 휴 머펫박사와 부인 아이린 플라워
뉴저지 프린스턴 통신(박현숙 통신원)
뉴저지 프린스턴 신학원에서 미션과 에큐메닉스의 헨리교수로 은퇴한 사무엘 휴 머펫박사는 한국초창기 개신교 선교사들 중 한분으로 사무엘 오스틴 머펫(마포삼열)의 아들로서 한국에선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최근 프린스턴 한인 커뮤니티 센터(KCCP) 건립기금으로 정성어린
기부를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그가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은 “이 곳의 한인들은 다른 인종의 이민자들처럼 고도로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면서 “한인들이 훌륭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감당하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또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장소가 필요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KCCP는 1세와 2세대의 한인 가족들에게 이민 문화권 안에서 가치있는 모국의 문화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인이라는 외국 땅을 자기의 고향으로 두고 한국인 아닌 한국인, 외국인 아닌 외국인으로 살아온 머펫박사의 체험이 반영된 뜻 깊은 의견이 아닐 수 없다. 머펫부부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하니 집 내부에 아름다운 한국의 장기, 그림들과 사진들, 근사한 비단장식과 한국의 마지막 왕비인 민비의 대례복의 재단 등으로 온통 채워져 있어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머펫박사의 부친인 머펫 선교사는 118년 전, 1월 15일인 자신의 생일날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여 그 후 46년간이라는 긴 생애를 한국 최초의 장기 개신교 선교사로 평양에서 보냈다. 사무엘 오스틴 선교사는 평민들과 가까이 지냈던 거리의 선교사였다고 한다. 그는 복잡한 서울을 떠나 그에 앞선 25년 전 한국에 첫 기독교 선교의 문을 열고자 왔던 장로교 선교사인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던 평양으로 들어갔다. 머펫 선교사는 돌에 맞아 1년 사이에도 여섯차례나 평양 밖으로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진실되고 정직하고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로 오로지 그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만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좋아했던 성경구절들 중 하나는 사도 바울에게서 온 것으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아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였다고 한다. 그는 46년 세월의 선교기간 중 평양에 장로교 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최초로 서양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였으며 1907년에 독립된 최초의 장로교단의 의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의 아들은 부친을 회고하면서 ”저의 아버님은 결코 자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드리고 싶어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머펫박사는 5형제 중 셋째 아들로 191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 그가 늘 사랑하는 한국에서 18세까지 살았다.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와서 퓌튼과 프린스턴에서 수학하고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와 그의 첫 부인 엘리자베스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1년간 중국어를 배우고 시민전쟁이 다가올 때 엔칭 대학과 낸킹 대학원에서 4년간 가르치다 종국에는 추방당했다(1947-51)엘리자베스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머펫박사는 드디어 1955년 그의 고향 한국으로 기쁘게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은 반쪽이 되어 버렸고 그가 태어났던 북녘 땅은 공산당에게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는 한국의 어느 쪽도 그리운 고향입니다”라며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나의 부친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그는 돌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꽃다발과 함께 환영을 받았습니다‘라고 덧 붙였다.다음 해인 1956년 머펫박사는 1년 전 프린스턴에서 현재의 부인인 아이린 플라워를 만났고 프린스턴 대학원을 졸업한 아이린 플라워는 서울 동대문의 연동교회에서 그와 결혼하기 위하여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아이린 여사의 한국이름은 ‘애린’으로 그녀는 본 통신원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지닌 뜻이 ‘사랑과 온정’이라고 일러 주었다. 아이린 여사는 동료 선교사인 킨슬러 박사가 오래 전 평양에서 시작했던 바이블 클럽운동을 매우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 운동은 가난해서 정규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대규모로 네트워크가 형성된 비정규 기독교 학교운동이었다. 안동에서 가난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해 성경구락부 운동을 시작해서 1981년 머펫박사 부부가 한국을 떠날 때는 전역에 소그룹들의 모임이 총 5만 여명의 규모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제자훈련을 통해 많은 주의 종들이 양육된 것이다.
머펫박사는 한국의 고향으로 돌아온 후 26년간 부친이 1901년 설립한 신학원의 교수로 봉사했다. 공산당의 침입으로 남한으로 피신오게 된 신학원은 서울에서 장로대학과 신학원으로 재조직되었다고 한다. 머펫 박사는 기독교 사를 강의하다가 아시아 기독교 사를 전문화 시켰으며 세계 선교학원 중 초대 신학원 총재가 되었다. 그는 또한 독립된 초교파적인 아시아 신학 연구센터의 협동 창립자가 되었다.(ACTS 1974-81)
그는 이 외에도 뉴욕한국 장로 선교회 대표, 왕립 아시아협회 한국 지사장, 대한 미국 교육위원회 회원 등으로 활동을 많이 하였다. 한국기독교사의 권위자인 머펫박사는 이미 1962년 ‘한국의 기독교인(1962)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 안에는 순수한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문화체취가 물씬 풍겨나는 사진들이 정겹게 삽입돼 있다. 또 다른 저서로는 ‘아시아의 기독교 역사 1권;초기-1500(1992), 2권:1500-1900(2005)가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영성을 가질 수 있는 가에 대한 질문에 간단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답했다.
또 개신교계 안의 비평적인 신학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매우 시사적인 답변으로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이다“라는 마가복음 9장 40절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계속해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신학적인 사고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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