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함께 문 연 단칸 공관 - LA 총영사관
3243 Wilshire Blvd. 한인타운 윌셔와 버몬트 길에 위치한 이 5층짜리 건물에는 한국정부에서 파견된 외교부와 행자부 등 9개부처 23명의 외교관들이 근무중이다. 다름 아닌 LA 총영사관이다. 비록 대사관보다는 한 등급 아래인 총영사관이지만 규모면에서 볼 때 주요 강국들의 대사관을 제외하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재외공관 중 하나다. 그만큼 LA 한인사회에 대해 한국정부가 갖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LA 총영사관의 관할지역도 넓다. 남가주를 중심으로 네바다와 뉴멕시코주도 이곳 담당이다. 때문에 공관 수장인 총영사의 위치 또한 여느 지역의 총영사와는 격이 다르다. 대부분 대사급 인물들이 발령받는 관계로 공관 내부에서는 ‘대사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1949년 민희식(왼쪽 두 번째) 초대 LA총영사가 한 모임에서 부인 전부귀 여사와 함께 미국인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맨 왼쪽은 동지회 회원이었던 조종익씨로 2차대전 당시 미군 군속으로 일본군의 무선내용을 감청하는 일을 맡았다.>
초대 민희식 총영사 ‘한국 알리기’
6.25 발발하자 미국방부 고문으로
5.16후 안광수씨 부임 때까지 공석
1968년 노신영 총영사 행콕팍 관저
LA 총영사관이 들어선 것은 1948년 11월21일이다.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이 이듬해 1월에 장면 박사가 취임하면서 문을 연 것과 비교하면 두달 정도 앞선다.
해방후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미 군정시절 운수부장을 지내고, 초대 교통부 장관을 맡았던 민희식씨(1980년 별세)를 초대 LA 총영사로 임명했다.
민 초대 총영사는 해방전 콜로라도주의 광산대학과 버클리 대학원을 거친 당시로는 몇 안 되는 미국통이었다. 특히 그는 유창한 영어구사력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데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할 당시 이끌었던 동지회 회원이기도 했다.
교통부 장관 취임 두달여만에 발령을 받은 민 초대 총영사는 부인 전부귀씨(1998년 별세)와 5남매를 데리고 그해 12월8일 LA에 도착한다.
당시 LA에는 초기 이민자를 중심으로 한 1,000여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국민회관이 위치한 한인장로교회와 연합감리교회 등 4개의 한인교회가 있었다.
민 초대 총영사는 21가와 시마론 길에 위치한 방 4개짜리 집을 임대했다. 지금은 완전히 흑인동네지만 당시에는 백인 밀집지역이었다.
공관은 다운타운 542 사우스 브로드웨이에 위치해 있던 아케디아 빌딩 4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 역시 지금은 완전히 상업지역으로 변모했지만, 그때만 해도 화이트 칼러들의 중심지로 아주 깨끗한 곳이었다.
말이 공관이지 총영사 사무실과 응접실을 겸한 사무직원용 방이 전부인 조촐한 사무실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것이 황폐화된 뒤 맞은 광복이었기 때문에 재정이 바닥난 한국 경제실상의 한 단면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5남매를 키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5남매는 아르바이트에 나서야 했다.
민 초대 총영사의 둘째 아들로 현재 한인타운에서 형사법 전문변호사로 일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해오고 있는 민병수 변호사는 “본국에서 돈이 왔지만 턱없이 부족해 허리를 졸라매는 수 밖에 없었고, 형제들도 저마다 필요한 용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나섰다”고 회고하면서 “주말이면 집을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유학생들에게 김치에 밥을 주는 일도 사실 버거운 일이었다”고 전했다.
이 당시는 미국인들은 거의 한국이란 나라를 알지 못했다. 또 일부는 아예 일본의 속국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민 초대 총영사의 임무는 한국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벽안의 미국인들을 만나는 자리면 한복을 곱게차려 입은 부인과 함께 나가 한국의 장구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민 초대 총영사는 한국정부의 양해하에 관직을 그만두고 미 국방부 민간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하다 1년여 뒤 다시 국무부에서 잠시 근무한 후 귀국해 한국주재 미 대사관 경제과 근무를 끝으로 1961년 은퇴한다. 이 때가 그의 나이 66세였다.

민 초대 총영사가 사직한 이후 LA 총영사관에는 1961년 10월 안광수 2대 총영사가 부임하기까지 10년간 공석으로 남게 된다.
1957년 현재의 윌셔가 문화원 인근 건물로 사무실을 옮겼지만 전쟁으로 재정이 고갈된 상태여서 공관장을 내보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신 이홍렬, 김창환, 최운상 영사 등이 공관을 지켰고, 1950년 9월5일 문을 연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의 주영한 총영사가 관리하는 형태였다.
이 기간에 미국에서는 폐허가 된 한국을 돕기 위한 구호의 손길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미 전역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또 미 정부도 수 억달러의 경제원조와 무기 지원 등을 계속했다.
1960년 4월19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와 무력 진압 사실이 전해지면서 4월23일 LA지역에 거주하던 유학생 등 한인학생들이 총영사관 앞에서 이승만 규탄 시위를 벌였다. 공관이 설치된 이후 벌어진 첫 정권반대 시위였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혁명이 성공한 뒤 그해 10월 군 장군출신이었던 안광수 2대 총영사가 부임한다.
그는 1968년 4월까지 거의 7년간 총영사로 재직, 최병효 현 총영사를 포함한 역대 17명의 총영사중 최장 근무기록을 갖고 있다.
그를 아는 올드 타이머들은 안 총영사를 영어가 유창한 매우 똑똑한 인물로 기억한다. 그러나 혁명의 당위성을 홍보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보낸 인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한인들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다소 어정쩡한 관계였다고 전했다.
LA한인회 조직 등 1960-80년대 한인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이경동씨는 “특히 유학생들의 거부감이 컸다”며 “당시 혁명정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모 인사가 USC를 방문했을 당시 혁명정부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학생들과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같은 한인사회의 분위기를 모를 리 없는 안 총영사는 ‘민심잡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3년 김호, 송철씨 등이 한인회의 전신인 코리안 커뮤니티 센터 건물을 매입할 당시 한국정부로부터 지원금 1만달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1968년 5월 노신영 3대 총영사가 부임했다. 훗날 안기부장과 국무총리까지 승승장구해 역대 총영사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를 아는 한인들은 전형적인 외교관으로 멀리 내다볼 줄 알았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노 총영사는 부임하자마자 한인사회를 파악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고, LA 시정부와의 관계증진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한인사회 인사들과 주요 정치인, 시 고위 관계자들을 자주 관저 또는 호텔로 초청해 우의를 다졌다.
특히 노 총영사는 현재의 행콕팍 로스모어 길의 총영사 관저를 매입했던 인물로, 15만달러에 사들인 관저가 지금은 수백만달러대를 호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부동산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는 우스갯소리도 가능해 진다.
한 인사는 “관저 구입 당시 노 총영사가 이 지역을 좋아해 조지 최씨에게 매물을 부탁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노 총영사는 이처럼 대외관계에서는 온화한 이미지를 보였지만, 공관 내에서는 엄격한 관리자의 모습을 보여준 ‘외유내강’형의 인물이란 게 올드 타이머들의 전언이다.
1972년 5월 노 총영사의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였던 소상영 4대 총영사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1974년 5월까지 2년간 재직한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내용들이 없다. 올드 타이머들도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모 인사는 이 시기가 한인사회 초석을 다지던 초기 이민자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소 총영사는 임기 후 본부 근무로 발령을 받아 귀국했고, 함께 일하던 김인두 영사는 휴스턴 총영사로 승진 발령됐다.
그러나 소 총영사가 근무하던 시기는 1972년 10월17일 유신헌법을 선포하며 영구집권을 추구하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주한인사회 민주세력의 저항이 서서히 일어서고 있던 중요한 시간이었다. 역으로 자국민 보호에 앞장서야 할 공관이 LA 한인사회에 대한 감시와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하는 침울한 시간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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