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전 우리가 LA로 살러가게 되었다 할 때 모두들 날씨가 좋은 LA로 떠나는 우리를 부러워하였다. 그땐 난 우물 안 개구리로서 한국의 날씨 외에는 몰랐고 날씨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런데 그 좋은 날씨 때문에 LA 사는 한인들이 겪는 즐거움이자 고통이 있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LA를 찾아오는 이유는 LA 사는 친척이나 친구 방문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날씨를 빼 놓을 순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예로부터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무더위에 농사짓느라 바쁜 철이기도 하거니와 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냉장고도 없어 음식도 문제고 에어컨이 없었으니 집안에서 옷차림도 문제였으리라. 그래서 여름엔 아예 남의 집에 방문도 않고 청하지도 않는 것이 상례였다.
최근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름 손님은 무섭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계절에 관계없이 바쁜 생활을 한다. 한국과 달리 LA에 사는 주부들은 대부분 낮에 생업에 매달린다. 한국처럼 도우미 아줌마도 쉽게 구할 수 없고 다들 바쁘게 일들 하기 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다.
떠나온 고국이 그리워 벼르고 별러 한국에 나가 보면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사치, 호강에 이질감만 느끼고 실망하고 돌아온다. 대접이라고 받아봤자 음식점에서 밥 한두 끼 대접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지만 그들이 LA 오면 사정이 다르다. 차편부터 관광 등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 바쁜 와중에 없는 시간 쪼개서 대접하여 보내면 한국 가서 흉 바가지다. “LA 사는 아무개는 일만 하고 형편없이 못살아 딱하다”는 등 들려오는 동정어린 말에 상처를 받고 억울한 기분은 배반감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물론 잘사는 친지를 방문한 사람의 경우는 “할 일 없이 골프만 치고 살더라”라고 부러움을 섞어 비아냥거리겠지만.
올여름 말로만 듣던 한국의 여름 손님을 나도 맞았다. 그것도 세 차례나. 첫 번째 손님은 마침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친척집이 있어 그곳에 숙소를 정하였지만 친척 내외가 새벽에 일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잠만 그곳서 자고 낮에는 하루 종일 우리 내외와 함께 보냈다.
친척집에 머물면서 처음엔 놀라는 눈치였다. “어쩌면 집안을 그리도 엉망으로 해 놓고 살지?” “물건은 아무데나 놓는 자리가 제자리야등등 이해를 못하더니 며칠 후”그럴 수밖에 없겠더라면서 떠나기 전 놀러 다니는 틈틈이 친척집의 케케묵은 집안 청소며 묵은 빨래까지 싹 해놓았다.
그런데 그 손님들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다른 손님들한테서 LA에 와 있노라고 연락이 왔다. 반가운 분들이었다. 이들 손님들도 떠나고 난후 ‘좀 더 잘해 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젠 곧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번에 한국이 아닌 미 동부에 사는 직장 후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저 LA 갈려는데 언니네 집에 며칠 묵을 수 있어요?”
같은 미국에 살면서 만나지도 못하고 전화로 통화할 때마다 LA 한번 놀러 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모처럼 시간을 내서 큰 맘 먹고 온다는데 안 된다고 말하면 얼마나 섭섭할까 생각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론이지” 라고 말하고 난 뒤 전화기 들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한 여름 손님 대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옛 친구들과 만나는 기쁨은 그걸 보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성경에선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대접한 손님들’이 천사였다고 말한다. 친구나 오래 알고 지내는 친지들이 멀리서 찾아오는 건 삶의 축복이다. 오래 못 본 직장 후배야 어서 오려무나.
배광자 글렌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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