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리자베스’는 16세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알려지지 않은 남자관계를 과감하게 엮어낸다. 엘리자베스는 왕위에 올라 로버트 더들리 백작과 정분을 나누게 되고 왕권을 둘러싼 많은 음모 속에서 힘겨운 시간을 겪게 된다. 그 와중에 더들리 백작은 여왕을 배신하고 다른 여인과 관계를 하게 된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과의 결혼을 선포하고 국정에만 몰두한다. 셰익스피어를 후원하는 등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다가 결국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옛 애인을 궁에서 내어 쫓지 않았고 평생 곁에 두었다. 그 남자를 못 잊어서가 아니라 남자라는 존재의 위험성을 늘 잊지 않고 삶의 경계로 삼기 위해서였다.
단지 영화 속 이야기라 해도 인생의 아픔, 실수에 대처하는 그녀의 삶의 방식이 독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살다 보면 우리는 때로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간다.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엄청난 사건들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다시 두려움 없이 살아간다. 잊으면 안 되는 정말 중요한 교훈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식대로 눈에 보이게 곁에 두고 늘 스스로에게 경고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얼마 전 조심성 없이 다리를 다쳐서 큰 수술까지 해야 했다. 얼마나 통증이 심하던지 두 시간마다 모르핀을 맞으며 참아야 했다. 다리에는 흉이 크게 남았지만 이제 목발을 짚고 다닐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병원신세를 졌다. 자기가 겪지 않고는 절대로 남의 고통을 알 수가 없다는 쉬운 진리를 이제야 온 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그 많은 장애인을 사랑으로 품지 못했음에 가슴이 아팠고 노인이나 몸 아픈 환자들이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고 없이 이날까지 살아왔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 지도 알게 되었다.
친구와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려면 헤어져서 고독 속에 있어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번잡하게 늘 친구에 둘러싸여 살 때보다는 고독 속에 있을 때 진정한 우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는 틈틈이 고독이 필요한가 보다.
나는 낯선 병원에서 세상을 정지시키고 닷새를 있었다. 뜻하지 않게 나의 모든 삶이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통증과 두려움, 고독 속에서 참 귀한 것을 많이 얻었다. 가족의 소중함과 이웃의 아픔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병상을 털고 일어나더라도 다리가 부러지던 아픔을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모든 상처에는 흉터가 남는가 보다. 더욱 조심하며 살아야지 경계하라고. 하루하루 회복의 과정 속에서 놀라운 감사를 느낀다.
김수현 / 작가·부동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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