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는 영국 북단의 자그마한 지역이다. 1700년 이전까지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곳의 하나였다. 그런 지역이 그 후 100여 년 동안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들을 배출하면서 오늘 날 현대 세계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들 이야기를 살펴본다.
세계화·교통 통신 혁명의 선두 주자
미국 건국에 사상적으로 결정적 기여
<스코틀랜드 국회 의사당>
21세기의 화두는 세계화다. 관세 장벽과 보호주의 대신 자유 무역이 세계 경제의 기조를 이루고 교통과 통신 혁명으로 온 세계가 지구촌이 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데 제일 큰 공을 세운 민족을 들라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
우선 경제 발전에 있어 자유 무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명쾌하고도 깊게 밝혀낸 이가 애덤 스미스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스코틀랜드 계몽 철학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 그는 1776년 ‘국부론’을 통해 어떤 정책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가를 파헤쳤고 그의 주장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편타당한 경제적 진리로 인정받고 있다.
증기 기관을 발명, 영국의 교통 혁명을 가져온 제임스 와츠 또한 스코틀랜드 인이다. 그의 증기 기관은 철도를 통한 인력과 물자의 대량 운송을 가능케 해 영국이 산업 혁명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서는데 기여했다. 철도를 놓는데 필수적인 철강의 대량 생산을 이룩해낸 앤드루 카네기 또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다.
와츠나 카네기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존 맥애덤스도 교통 혁명에 일조한 사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다. 맥애덤스 이전 유럽의 도로는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는 흙 길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포장도로의 대명사인 아스팔트를 개발한 사람이 바로 맥애덤스다. 지금도 아스팔트가 깔린 길을 ‘타르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맥애덤스의 타르’에서 온 말이다. 그의 발명품은 처음에는 마차가, 나중에는 자동차가 수렁에 빠질 걱정할 필요 없이 빠르게 대륙을 누비는 것을 가능케 했다.
지금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중요성이 줄어들었지만 한 때 통신 혁명의 대명사였던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 또한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이다. 에딘버러 태생인 그는 캐나다로 이민 왔다 보스턴으로 옮겨 귀머거리에게 말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모친과 아내가 귀머거리였던 것이 음성에 대한 연구를 자극, 전기의 강약을 소리로 바꾸는 발명품을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8세기 스코틀랜드는 의학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영국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 선진 의학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몰려들었다. 페니실린 발명,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 이 곳 사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때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했던 찰스 다윈이 택한 곳도 여기였다. 그러나 그는 의학을 배우기보다는 스코틀랜드 출신 지질학자였던 허튼과 라이엘의 영향 아래 진화론에 착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보다 스코틀랜드 인이 현대 사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미국의 건국을 통해서다. 캐나다 동부 주의 하나가 ‘노바 스코시아’인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코틀랜드 인들의 아메리카 이주는 일찍부터 시작됐다. 독립심과 개척심이 강했던 스코틀랜드 인들은 훗날 미국이 독립하는데 제일 먼저 앞장섰다. 이들은 독립군의 일원으로 실제 전쟁에 뛰어든 것은 물론 사상적으로도 독립을 열렬히 주창했다.
‘자유와 상식’을 근간으로 하는 스코틀랜드 계몽 철학이 미 건국이념으로 자리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 대표적 인물이 존 위더스푼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잘 나가던 목사였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맡으면서 자유 토론을 위한 진리 탐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성직자이면서도 과학을 배척하지 않고 백인이면서 인디언과 흑인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의 수제자가 연방 헌법을 기초한 제임스 매디슨이다.
토마스 제퍼슨의 스승 또한 스코틀랜드 인이었고 패트릭 헨리나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인물도 조상이 스코틀랜드 인이다. 미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55명 중 1/3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사실만 봐도 미 건국과 스코틀랜드 사상과의 깊은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현란한 이론이 아니라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는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주장은 미국인들 생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 독립 전쟁에 불을 당긴 토마스 페인의 책제목 ‘상식’은 이를 인정한 것이다. 34년간 연방 대법원장을 하면 미국 법질서의 토대를 닦은 존 마샬이 이 학파 추종자이며 미국의 대표적인 사상인 실용주의 또한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미국 교육계는 19세기말까지 이 사상의 영향권 하에 놓여 있었으며 지금까지 그 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코틀랜드를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전통의상을 입은 스코틀랜드 군인>
천재들의 나라
영국 북쪽 춥고 척박한 토양에 자리잡고 있는 스코틀랜드는 18세기 이전까지 거들떠볼 만한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영국을 쳐들어갔던 로마인들도 더 이상 올라가 봐야 별 낙이 없다고 판단, 황제의 이름을 딴 하드리안의 장벽을 쌓고 야만인들이 쳐내려오는 것을 막는데 주력했다. 이 장벽은 지금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지역이 어떻게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등 각 분야에 걸출한 인물을 쏟아내며 최고 수준의 문화를 이룩해냈을까. 스코틀랜드인의 업적을 자세하고도 흥미롭게 쓴 책 중 하나인 ‘어떻게 스코틀랜드 인들이 현대 세계를 만들었나’(How the Scots Invented the Modern World)를 쓴 아더 허먼은 스코틀랜드의 부흥이 16세기 중반 존 녹스의 종교 개혁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장 칼뱅 신봉자였던 그는 영국 국교를 배척하고 개신교 정신에 근거한 교회를 만드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무조건 성직자의 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신도 각자가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훗날 ‘학교 법’으로 현실화돼 스코틀랜드 전역 작은 마을에까지 학교가 세워지는 결실을 맺게 된다.
그 결과 시골 어린아이들까지 문맹에서 벗어났으며 마을마다 도서관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책을 읽는 것이 보편화됐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문자 해득률은 75%로 유럽 최고였으며 영국은 19세기 후반까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국민 모두가 책을 읽는 풍토 속에서 기라성 같은 사상가와 과학자들이 탄생했으며 이것이 국력의 원천이 된 것이다. 책 읽는 일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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