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님은 제게 어머님 이상의 존재이십니다. 평생을 갚고 또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제게 베풀어주신 분이죠.”
자신을 낳아 준 친부모를 모시는 일조차 버겁게 생각하는 요즘 같은 세대에 부모 잃은 조카를 친자식 이상으로 키워준 노령의 이모를 15년 넘게 병수발을 하며 아낌없는 효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송영길(50)씨.
송씨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그를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칭송하지만 정작 송씨는 “어르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채고 챙겨주려 노력하는 것 밖에 없다”며 겸손해했다.
송씨가 이모 엄성자(91세) 옹의 손에 자라게 된 사연은 6.25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3세였던 송씨는 물감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변호사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꽤 재력가로 꼽히는 집안의 막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쳐들어 온 공산당들이 청년호국단장이던 아버
지와 어머니, 조부모까지 모든 식구들을 잡아갔고 이후 1.4 후퇴 때 집단 생매장됐다는 확인 불가능한 소식만 들려올 뿐 생사를 알 길이 없게 됐다.
당시 어머니의 막내 여동생이던 이모 엄옹이 송씨와 그의 형을 데리고 급히 피난을 떠나면서 ‘이모와 조카’가 아닌 ‘엄마와 아들’의 인연으로 살아가게 된 것. 특공무술을 연마한 태권도(9단) 사범 출신인 송씨가 미국에 온 것은 1974년. 태권도장과 특공무술 체육관 등을 운영하며 시작한 그의 미국생활 중심에도 늘 엄옹이 자리하고 있었다.
풋남 카운티 노인센터 주방을 책임졌던 엄옹은 카운티 정부가 인정한 최고의 요리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한때 전쟁의 폭격 속에서도 쌀 한가마니를 거뜬히 지고 탈출했던 여장부였던 엄옹은 1992년 교회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척추를 다쳤고 이때부터 송씨의 병수발이 시작됐
다.
사고 직후부터 송씨는 엄옹의 대소변을 직접 받아내며 병상을 지켰고 이후 현재까지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모든 일을 직접 보살피고 있다. 어디를 가든 항상 엄옹과 동행하는 송씨는 3년 전에는 거동이 불편한 이모를 보다 편히 모시고자 컨버전밴을 구입했고 이웃 노인들에게도 수시로 차량서비스를 제공해오고 있다.
그러한 송씨에게도 물론 힘든 시절이 있었다. 한때 타인종 여성과 결혼했지만 어른공경에 대한 문화적 차이로 결국 2년만에 헤어졌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0년에는 신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기도 했다. 병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외출하고
돌아온 뒤 죽음을 준비하며 수술대에 올랐지만 기적처럼 새 삶을 얻을 수 있었다고.
거동이 불편한 것을 제외하곤 91세의 노령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건강한 엄옹은 “하루 빨리 제짝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원이 없겠다”며 송씨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일과가 됐다.지금도 엄옹과 단 둘이 살며 기쁜 마음으로 봉양하고 있는 송씨는 “이모님과 함께라면 어디
든, 언제든 함께 하고 싶다”며 “그저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내비쳤다.
<이정은 기자> julianne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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