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했던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 때 1위로 선정된 인물이 징기스칸이다. 그 이후 한국과 미국 등 각지에서 징기스칸을 새롭게 조명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잭 웨더포드가 쓴 ‘징기스칸과 현대 세계의 성립’(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이다. 최근 밝혀진 징기스칸의 진면목을 살펴본다.
참혹한 정복전쟁후‘몽골의 평화’이뤄
서양문화 곳곳에 남아있는 몽골의 흔적
몽골은 인류 역사상 최대 제국을 건설한 나라다. 지금은 조그만 나라로 오므라들었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하나가 ‘후레이’(hurray)라는 단어다. 이는 몽골 인들이 승전 후 소리쳤던 몽골어다. 지금 서양 옷으로 알고 있는 양복도 실상은 몽골에서 전해진 것이다. 서양의 전통 옷은 토가와 튜닉 같은 통으로 된 것이었는데 몽골 인들이 바지와 조끼 등을 입은 것을 본 후 이를 받아 들였다.
최근까지 몽골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중국인들이 몽골을 일컫는‘몽고’라는 단어는‘무지몽매하고 고루한 나라’라는 어감이 들어 있다. 몽골인을 ‘몽고인’으로 부르는 것은 한국인을‘조센징’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저능아, 야만 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몽골 인들은 이처럼 무지하고 야만적이기만 했을까. 몽골 인들이 자신들에 저항하던 적들에게 잔인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복한 적에게는 의외로 관대했다. 단 적국의 지배계급에 대한 태도만은 무자비했다. 당시 관습은 적국을 차지한 후에는 왕과 귀족을 예우했지만 몽골은 아예 멸족을 시키거나 일반 노예와 같이 취급했다. 이것이 몽골에 대한 잔악성이 강조돼 온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광활한 스텝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에 불과했던 몽골을 세계사에 올려놓은 것은 징기스칸이다.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일대기를 몽골어로 적은 ‘몽골 비사’는 몽골 제국이 멸망한 한 후 종적을 감췄다. 소련이 사실상 몽골의 지배자가 된 후 과거 몽골 침략의 치욕에 치를 떨던 그들은 이를 연구하는 것을 엄히 금했다. 이 책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련 멸망 이후다.
이에 따르면 1162년 부르칸 할둔 산 인근 오난 강가에서 태어난 징기스칸의 일생은 처음부터 평탄치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남성과 신혼여행 중이던 것을 아버지 예스가이가 약탈해 와 아내로 삼았다.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자신이 죽인 타타르 족의 장수 이름을 따 테무진이라고 지었다. 테무진이 9세 때 아버지는 타타르 족의 복수로 독살되고 테무진은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전락, 곳곳을 전전한다. 이 와중에도 자신을 업수히 여기는 이복형을 살해하고 가족의 주도권을 잡지만 한 때는 노예로 잡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기도 한다.
어릴 적 친구 자무카와 의형제를 맺고 세를 불려 나가던 테무진은 어렸을 때 약혼한 보르테와 결혼한다. 그러나 역시 신혼 무렵 인근 부족에 신부를 약탈당하며 뒤늦게 찾아오기는 하지만 아내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그 후 태어난 첫 아들 조치는 테무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며 이는 두고두고 분란의 씨앗이 된다.
그 후 자신을 배신한 자무카를 죽이고 몽골을 통합한 테무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나이만과 타타르 같은 인근 부족을 치고 여진의 금을 무너뜨린다. 항복한 금이 훗날 반란을 일으키자 여진의 지도부를 몰살시킨다. 그 후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콰리즘 왕국과 교역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그 쪽 왕이 몽골을 깔보고 사신 얼굴에 칼질을 해 보내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폐허로 만든다. 내친 김에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 러시아를 쳐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후 1227년 숨을 거둔다.몽골의 정복 전쟁 과정은 잔혹했지만 그 뒤 찾아온‘몽골의 평화’는 진정한 동서 교류의 물꼬를 텄다는 게 요즘 학자들의 평가다. 몽골 치하에서는 어느 곳보다 폭넓은 종교의 자유가 인정됐으며 능력 위주의 행정이 펼쳐졌고 여성의 지위도 높았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궁궐을 방문하고 원 제국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을 기술,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콜럼버스가 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난 것도 이를 찾아서였다.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같은 인물들도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 공과 과를 구별하듯이 징기스칸의 공과도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 많은 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징기스칸의 초상화. 그러나 사후에 그려져 정확한 묘사인지는 불분명하다>
테무진 리더십의 비결
몽골군은 전성기 때도 10만을 넘지 않았다. 이 적은 숫자로 자기보다 수십 배나 많은 모든 나라 모든 군대와 싸워 이겼다. 이름 없는 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사방을 전전하던 징기스칸은 어떻게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 비결은 지도력과 사람을 끄는 힘이다. 그는 무엇보다 충성심을 중요시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끝까지 돌봐 준 대신 배신자는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사귀었던 동지들은 거의 대부분 극한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두 번째는 능력 위주의 인사다. 당시 몽골 사회는 모든 것을 같은 부족이냐 아니냐가 결정했다. 징기스칸은 능력만 있다면 다른 부족이든 천민 신분이든 가리지 않고 썼다. 적대적인 부족도 일단 정복한 후에는 지도부를 제외하고는 자기 부족과 똑같이 대접했으며 이 중 하나를 양자로 삼아 길렀다. 이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이복형은 자신을 괴롭혔는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 부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는 끊임없는 지식 습득과 응용이다. 초원이 주 활동 무대이던 몽골 족은 도시를 공략한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 기술자들로부터 공성 무기 만드는 법을 배웠고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는 자는 우대했다. 장거리 원정을 갈 때는 힘들게 무기를 끌고 가는 대신 이들을 말에 태우고 가 현지에서 제작했다. 중국의 화약과 서양의 철제 기술, 회교권의 과학을 한데 묶어 고성능 대포를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다.
네 번째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한 점이다. 징기스칸으로서 절대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은 후 자기보다 나은 경우에는 따랐다.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자식들을 모아 후계자 문제를 논의할 때도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고 자식들과 합의에 의해 셋째를 택했다. 그리고는 무엇보다 오만과 분노를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징기스칸의 리더십은 요즘 CEO를 위한 경영 교실에도 자주 등장한다.
<잭 웨더포드 작 ‘징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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