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다녀온 방학 여행
지금도 생생한 기억 자녀에 전파
어렸을 때 한국에서 60년대 초반까지는 아이들 수에 비해서 교실이 심각하게 모자랐으므로 일부지역에서는 초등학교가 3학년까지 교대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했었다. 그것도 한반에 100명씩 들여 보냈는데도 말이다. 어느날 우리 반이 아침반이었던 날 아침에 새로 전학 온 아이가 아주 개구장이 노릇을 해서 소란을 피웠고 급기야는 말리려는 나와 몸싸움까지 붙어서 완전히 일이 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마침 그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 오셨다. 선생님은 물론 둘 다 나무라셨지만 반장이였던 나에게는 더 큰 책임을 물으셔서 수업이 끝나도록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손를 들고 벌을 서게 하셨다. 새로 온 아이를 잘 봐주지는 못하고 싸움까지 하는 게 반장이냐고. 그런데 문제는 오전반이 끝난후 무슨 급한 일이 있으셨는지 그 선생님이 앞에서 벌을 서고 있는 나는 깜빡하시고 교무실로 가셨다. 이어서 들어온 오후반 선생님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시고 그냥 수업을 진행했고 오후반이 끝난 후에야 아마 누구에겐가 얘기를 들으셨는지 선생님이 헐레벌떡 반에 돌아 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깜빡해서 하루종일 벌을 세우신 선생님도 선생님이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하루 종일 벌 선 나도 얼마나 고지식 했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분명히 사실이라고 기억하는 이유는 그 해 여름방학에 일어난 일 때문이다.
그 선생님은 군대를 막 다녀온 총각 선생님이 였는데 방학이 되기 얼마전 우리집에 오셔서 부모와 함께 무슨 얘기를 한참하시더니 인사를 하고 가시는 것이었다. 그 얘기의 내용은 곧 알게 되었지만 9살짜리인 나를 선생님이 데리고 한국 여러 곳에 있는 선생님의 친척친지 들의 집에 데리고 다녀와도 되겠는가 하는 것이였고 나의 부모는 또 쉽게 허락을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담임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충청북도 산골에서 시작을 해서 여수의 시장님 집에까지 그 때까지 상상도 못해 보던 세계를 구경하고 직접 체험할 수가 있었다. 중간에 집 생각이 나서 혼자 세수 대야에 물을 떠 놓고 몰래 울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한 남한 일주여행이 나의 눈을 활짝 열어 주었고 평생 여행을 무척이나 즐기는 삶의 시작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 벌을 설 때의 아픔은 별반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 여름 방학 때 경험한 한국 여름의 여러 대조적인 정취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할 정도이니까.
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어느 시골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한참 가다가 내려서 한참 걸어가니 마음이 다 시원하도록 활짝 열린 그 어느 곳의 평야에 이르렀고 그 평야를 정종 한 병을 이 쪽 손 저쪽 손에 번갈아 들어가며, 또 내 짐을 등뒤에 메고 하염없이 선생님을 쫓아갔다. 한참 가다가 뒤돌아보니 신기하게도 그 넓게만 보였던 평야를 어느덧 건넜고 이제는 제법 가파른 언덕길이 나왔다. 그 산길을 마침 지나가는 황소달구지를 얻어 타고 가기도 하고 또 소가 싸 논 넓직한 똥을 피해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던 일, 그래서 저녁이 어둑 어둑할 때에나 어느 싸래 나무 울타리를 돌아 문도 달리지 않은 문가에서 “계세요!” 하고 들어간 그 집! 나랏님이 누구냐고 할 정도로 소식이라고는 가끔 다녀가는 소금장사나 듣는 것이 고작인 그 곳에서 체험한 시골의 정취는 너무나도 신기하기만 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새벽부터 시골 특유의 매콤한 연기냄새에 눈을 떴는데 어른들은 이미 일나가고 없었고 어디서인지 애들이 모여왔다. 그 아이들을 따라 근처 개울가에 나갔더니 포플라 나무에서 울어대는 매미 소리는 싱그럽게 들렸고, 그 맑은 물에서 태어난 모습 그대로 물장난을 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김매던 어른들을 찾아가 함지박에 잔뜩 가지고 온 뜨끈뜨끈한 밥과 싱싱한 야채를 쌈장에 찍어 먹었다. 또 밤에는 횃불을 켜들고 냇물 구석 구석을 쑤셔가며 메기, 붕어, 미꾸라지 등을 잡아서 즉석에서 고추장과 함께 매운탕도 시켜 먹고! 솔직히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너무 비렸지만 그래도 지금 그 매운탕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서 한 일주일 정도 있다가 이제는 또 장소를 바꾸어서 중간에 이곳 저곳을 들려 여수로 내려갔는데 거기는 여수시장님의 집이었고 맛있는 바닷생선에 때로는 시장님의 차를 타고 싸이렌을 울리며 해수욕장에 놀러 가곤 했다. 여름 한달을 사이로 서울시 종로구 낙산 밑 동네에서 충청북도 산골구석, 그리고 바다의 냄새가 물씬 나는 여수를 돌아보며 느낀 것은 똑같은 태양아래서도 이렇게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이고 이 사실은 나의 어느 한 부분을 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척이나 여행을 했다. 그것도 호텔에서 호텔로,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은 어느 곳이나 마켓이 많으니까 얼음상자 하나에 취사도구를 가지고 어디든지 틈만 나면 신나게 몰고 다녔다. 주차장에서 자기도 했고 친척집에도 가고 또 카작스탄, 아프가니스탄, 중국, 한국, 멕시코, 남아연방 등등 외딴 선교지에도 보냈다. 수학여행도, 교회여행도 빠지지 않고 보냈다. 어떤 곳은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갔다. 69년에는 분명히 유타의 Salt Lake 에서 4지를 물 밖에 내놓고도 뜰 수 있었는데 그동안의 채염활동으로 염분이 줄어서 2000년에는 맥주병처럼 가라앉고 말았다. 강산도 10년이면 변한다고 호수가 있던 것도 없어지고 없던 것도 생기는 것을 본다. 여행은 갈 때마다 모습이 변하고 감회가 다르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인생의 여정에서 매일 변해가고 그 자체로도 항상 새로운 감회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난 3년새에 벌써 3번째로 보스턴에 와있다. 3년전에는 대학 구경시켜주느라 왔었고, 2년전엔 애들 보러 왔었고, 올해는 학부모를 위한 주말에 조부모님도 모시고 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감회를 맛보고 있다. 그 감회는 다음 주에 같이 나눠 보고 싶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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