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진 ‘정치영화’… 화제도 만발
‘대통령의 죽음’에 쏠린 눈… 눈…
시사회 만원사례… 드라마론 실패작
기록영화 ‘딕시…’ 고난 이긴 수작
<부시(가운데)가 호텔 밖에서 총에 맞아 경호원이 그를 감싸고 있다. ‘대통령의 죽음’.>
제31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 7일~16일)에는 유난히 정치성을 띈 영화들이 많았고 또 일반 관객들과 기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번에 정치적 영화가 많았던 것은 9.11 테러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제 사람들이 어느 정도 객관적 시각으로 9.11 이후의 정치및 사회적 상황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제가 열리기 전부터 화제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정치영화가 부시암살을 다룬 ‘대통령의 죽음’ (Death of a President). 영국감독 게이브리엘 레인지가 만든 이 영화는 유사 기록영화로 부시가 시카고서 암살된 2007년 10월 19일 1년 뒤에서부터 얘기가 시작된다.
뉴스필름과 실제로 찍은 장면 및 컴퓨터로 변형시킨 장면등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부시 암살 후의 더욱 보수화된 미국의 현실과 함께 1년 전 부시가 암살되던 날의 상황과 이 사건을 다루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및 범인체포 과정등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는 잘 만든 영화였지만 인터뷰 장면이 너무 많아 극적 충격이 없는 작품이 되었다. 기자들의 반응도 미지근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배급한 미국의 뉴마켓이 영화를 사 곧 미국 내서 개봉할 예정이다.
이 영화에 못지 않게 화제를 모은 것이 ‘딕시 칙스: 입 닥치고 노래나 해’ (Dixie Chicks: Shut Up and Sing). 텍사스태생의 여성3인조 인기 컨트리밴드 딕시 칙스가 3년전 런던서 공연할 때 리드 가수 나탈리 메인스가 “대통령이 텍사스 출신이라는게 수치스럽다”고 발언한 후 겪은 수난을 다룬 기록영화다. 살해위협과 컨트리라디오방송국의 보이콧등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은 3인조의 용기와 단결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
데모꾼 반체제 배우 마틴 쉰의 아들로 배우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스가 감독으로 데뷔한 ‘바비’(Bobby)도 좋은 정치영화. 1968년 민주당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바비 케네디의 LA 앰버서더호텔서의 암살을 다룬 감정적인 드라마다. 지금은 사라진 지나간 시절의 희망과 정의를 그리워하는 작품이다.
이탈리아감독 나니 모레티가 만든 ‘악어’(The Caiman)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수상을 야유한 풍자극으로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영화. 프랑스군의 알제리아인들에대한 무차별 잔혹 행위를 그린 ‘대령’(Mon Colonel)은 요즘 부시와 이라크전의 과거판을 보는 것 같다. 알제리아에 민주주의와 문명을 심어 주겠다는 대령이 부시를 연상케하는 작품이다.
중국의 천안문사태를 배경으로한 못 이룰 사랑의 이야기인 ‘하궁’(Summer Palace)은 극적 강렬성은 다소 미흡하나 역작이다. 감독 루예가 영화를 당국의 허가없이 칸영화제에 출품, 그는 앞으로 5년간 국내활동이 금지됐다. 또 ‘밤 낮 밤 낮’(Day Night Day Night)은 뉴욕타임스 스퀘어에서 자폭하라는 임무를 맡은 여자의 테러 준비 과정을 치밀하게 다룬 극영화.
이밖에도 3편의 기록영화가 주목을 끌었다. 존 레논이 평화주의자로 미국내 여론을 이끌면서 당국의 탄압을 받은 과정을 그린 ‘미국 대 존 레논’(The U.S. vs. John Lennon)은 지금 미국 내서 상영되고 있다. ‘테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한스-요하임 클라인의 이야기 (My Life as a Terrorist: The Story of Hans-Joachim Klein)은 독일의 급진좌파 테러리스트였다가 반폭력주의자가 된 클라인의 얘기. 그리고 ‘죄수 또는:나는 어떻게 토니 블레어를 죽일 계획을 했는가’(The Prisnor or: How I Planned to Kill Tony Blair)는 영국 TV에 고용된 이라크 저널리스트가 영국수상 블레어 암살 혐의자로 체포돼 9개월간 옥살이한 경험을 그렸다.
정치꾼 기록영화 감독 마이클 모어는 이번 영화제서 미국의 잘못된 의료체계를 파헤친 ‘시코’(Sicko)와 제작중인 ‘위대한 ‘04년의 슬래커 봉기’(The Great ‘04 Slacker Uprising)의 일부를 상영,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홍상수 특징’녹아있는 로맨틱 코미디
‘해변의 여인’관심 끌어
상쾌한 대사 -고현정 연기 돋보여
<중래와 문숙이와 창욱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변의 여인’>
한국영화는 모두 5편이 출품됐다. 한국서 빅히트를 하고 있는 봉준호감독의 ‘괴물’과 역시 올해 히트작인 이준익감독의 ‘왕의 남자’ 그리고 김태용감독의 ‘가족의 탄생’과 홍상수감독의 ‘해변의 여인’및 김기덕감독의 ‘시간’등이다.
이중 ‘가족의 탄생’과 ‘왕의 남자’는 이미 시중에 비디오로 나와 있어 본것들이고 ‘괴물’은 기자가 토론토에 도착하는 날 오전에 이미 상영을 마쳐 관람을 못했다. ‘괴물’은 토론토에서도 큰 관심을 모았는데 영화를 본 비평가들의 의견은 ‘한국의 조스’라는 평가와 ‘한국의 고지라’라는 평가로 양분됐다.
영화제서 본 ‘해변의 여인’과 ‘시간’을 만든 두 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감독들이다. 나는 두 감독 중 홍상수를 더 좋아하는데 그의 영화같지 않은 영화를 보면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홍상수를 흔히들 프랑스의 로베르 브레송과 에릭 로머에 비유하는데 ‘해변의 여인’은 뉴웨이브감독 로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로맨틱 코미디다.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접근이 쉽고 영화의 시간같이 봄날 해변의 바람쐬듯 상쾌하고 또 매우 우습다.
홍상수의 영화는 질서정연한 서술을 무시하는데 에피소드식 개개의 장면이 모두 똑같은 비중을 지니면서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그 장면들을 반추하다 보면 비로소 전체가 뚜렷이 나타난다. 그의 영화는 특별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대사 위주의 것이다.
‘해변의 여인’도 마찬가지. 글이 안 써져 애를 먹는 영화감독 중래(김승수)가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봄철 한산한 서해안 휴양지 신두리로 내려 가면서 자기 후배이자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창욱(김태우)과 창욱의 애인으로 독일서 작곡공부한 문숙(고현정)과 동행한다. 셋은 해변 횟집에서 술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해변을 산책하는데 이 과정서 중래와 문숙이 마음과 몸을 나누게 된다. 과연 그 마음이 사랑인지는 애매모호하다.
이어 영화는 홍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양분법 스타일을 갖추며 이번에는 같은 해변서 중래와 이곳에 놀러온 문숙을 닮은 선희(송선미)와 그녀의 여자 친구의 얘기로 전환된다. 중래가 문숙을 닮은 선희를 좋아하게 될 것은 뻔한 일.
홍상수의 영화치곤 서술이 직선적인데 대사와 배우들의 얼굴 표정등을 통해 묘사되는 주인공들의 내면풍경이 아름답다. 설명하기 힘든 신비한 매력을 지닌 홍상수의 특징이 잔잔하게 깔린 사랑과 이미지와 과거에 관한 친근하고 차분한 산책과도 같은 영화다. 극적인 것도 또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홍상수영화에서는 로머의 그것에서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낫다. 그의 남자들은 대부분 우유부단하거나 자기 위주적이요 다 큰 아이들 같은 반면 여자들이 결단력있고 사리판단이 분명하다. ‘해변의 여인’도 그렇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대사들은(어느 영화건 남녀가 술 마시며 얘기하는 장면이 꼭 있다) 때로 고답적이기도 하지만 늘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사랑,고독, 섹스,별, 집념, 그리움, 억지부리기등 아무나 다 하는 얘기들.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이런 말들을 늘 들을 수는 없다. 그 것을 홍상수가 영화에서 말해준다. ‘해변의 여인’은 촬영도 아름답고 연기들도 좋은데 특히 고현정의 미묘하고 평범한 연기가 빛나게 곱다. 영화를 본 로라 김 WIP 홍보 및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이 “너무 좋다”고 칭찬했다.
김기덕의 ‘시간’은 그의 작품중 질이 낮은 것이다. 몇 년 사귄 애인이 자신의 얼굴에 실증을 느낀다고 생각한 여자가 얼굴 성형수술을 하나 그 후 둘은 오히려 더 남이 된다는 내용. 김기덕의 사이코기질이 덜 나타난 영화로 사랑과 외모의 상관 관계를 탐구했으나 반성형수술 영화 수준에 그쳤다. 영화를 함께 본 헨리 쉬핸 LA영화비평가협회장도 “실망했다”고 말했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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