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양숙
3월 중순인데 몹시도 바람이 분다.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 뭉치들이 이리구르고 저리 날리며 소란스럽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마치 가을의 마지막 자락같다. 올해는 왜 이리도 겨울이 길고 비가 많은지 사막에까지 야생화가 만발하였다는 소식이다. 가고싶다. 너무 보고 싶다. 오늘은 내 생일이라고. 그래도 하나뿐이 내 딸이 주동이 되어 아이들에게 카드를 쓰라고 강요했는지 공책의 두 배나 되는 큰 카드엔 여섯이나되는 아이의 축하 인사가 담겨있다.
승욱, 로렌스, 원경, Grace, 윤짱, 유까짱.
승욱인 한국서 온지 8개월째 되는 유학생이고, 로렌스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아이로 시누이의 아들이다. 어렸을적 내가 기르다가 지난 가을 다시 공부하러 돌아온 작은 눈으로 항상 우리들을 웃게 하는 재밌는 아이다. 원경인 내 오빠의 딸로서 역시 유학생인데 아이들중 제일 큰 언니다. 우리집에 온지 4년차로 나의 가장 큰 말동무요, 모범생이다. 오빠가 피부과의사이므로 한국서는 꽤 부잣집 고명딸임에도 그 아이 수중에 돈이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나오는 법이 없다. 유우머가 많고 인정이 많아서 내가 때로 우울해 할 때면 위로한답시고 북한에서 유행한다는 노래 ‘어젯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을 두 손을 붙잡고 배 위에 올려놓고 이상한 표정으로 들려주고, 눈을 치뜨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던 대사를 흉내내면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깔깔대곤 한다. 맨 처음 미국와서 학교에 등록하던 날, ESL 선생님에게 ‘하이’소리도 못하던 수줍던 아이가 지금은 문법이 꼭 맞는 유창한 영어로 농담까지 하는 걸 보면 한국서 아무리 비싼 족집게 과외를 한다해도 영어는 역시 미국 본토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Grace는 하나 뿐이 나의 딸이다. 12학년으로서 미술대학 진학 예정인데 어느 곳을 정할지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철이 조금은 들었는지 장학금 많이 주는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아이들 호칭으로는 ‘하숙짐 마님 딸’이다. 윤짱은 일본에서 관광하러 약 2주간 우리 집에 와 있는 한국 아이로서 일본 대학생인데 약간의 공주병끼가 있다. 미국 할머니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자기방에 거미가 기어다닌다고 수소문끝에 우리집으로 도망온 아이다. 개도 무서워해서 우리 ‘키키’와 ‘망치’를 보곤 쏘파위로 도망간다. 유까짱은 윤짱의 학교친구로서 미국 할머니 집에 머물고 있는데 낮엔 우리 집에서 먹고 놀고 나와 윤짱이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닌다. 이 아이는 전형적인 우파 일본 아이다. 일본의 우월함과 그 잘난 일본의 영어발음을 고집하며 우기는 아이다. 윤짱과 내가 Costco에 가자고 하니까 왜 ‘코스트코’를 ‘카스코’라 하느냐는 거다. Seatbelt를 ‘씨또베르또’라 하는데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즘은 아이들 학교 갔을 때 샌프란시스코 관공을 시켜주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이라면 내 전공이지. 어디 나도 바람좀 씌어 볼까? 게어리에서 월남국수를 먹고 Lombard 꽃길을 먼저 내려간다. 철이 이르고 날씨가 추워서 수국은 하나도 아직 피지 않았건만 무엇이 이쁘다는 건지 사진 찍느라고 야단이다. Palace of Fine Art로 가 웅장한 돔과 그 건축미를 보여줌으로 약간의 기를 죽여 놓고 금문교 전망대를 U턴하여 산 꼭대기로 올라간다. 바람이 몹시 분다. 그 센 바람에 커단 덩어리 구름도 밀려갔는지 다리 전체가 환히 보인다. 이곳이 다리 전체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윤짱의 디카로 둘의 증명사진을 찍어 준다. 쟤네들은 왜 사진찍을 때 마다 손으로 V자를 만드는지 매번 똑같은 포즈다.
바로 저자리, 아빠와 사진 찍었던 자리를 쳐다본다. 웬 남녀가 추워서 인지, 사랑해서인지 오래도 끌어안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년전 딸의 13번째 생일파티날 돌아가신 그 이는, 그 고집세고 세상 모르던 철없던 아내가 ‘하숙집 아줌마’가 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며 무어라 생각할까? 감기 한 번 안 앓던 건강하고 체격좋은 사람이었다. 처음엔 딸꾹질을 가끔 하였다. 그것이 한 두달이 지나자 횟수와 시간이 길어져서 어느 때는 30분이상을 계속하였다. 병원에서는 X-Ray를 찍고 횡경막의 이상이라며 약을 처방하였다. 조금 나은 듯하며 한 두 달이 지나갔는데, 이번엔 타이핑이 자꾸 틀린다고 하였다. 30년 이상 타이핑을 하며 비즈네스 했기에 눈 감고도 하는 사람인데… 그는 눈이 더 나빠졌나봐 했다.
어느날 은행에 들어갔던 이가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은행원 아가씨는 한심한 표정으로 서 있고, 아빠는 열심히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다. 뒤에서 들여다보니 세상에, 자기 주소와 이름을 빨리 쓰지 못하여 얼굴엔 땀이 솟아있고, 이미 쓴 글씨는 삐뚤삐뚤 거리며 라인을 한 참 벗어나 위로 올라가 있었다.
자기 말에 의하면 머리가 좋아서 국민학교때는 TV의 수학 경시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으며(증명해 줄 사람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Buyer에게서 오다 받은 것은 줄줄 외고 있다고 직원들이 혀를 내두르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그 은행 디파짓 종이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서둘러 찍은 MRI. 왼쪽 이마 위 머리 속에 벌써 3cm 가량의 Tumor가 생겨 있었고, 이것은 왼쪽 신장에서 생긴 암이 혈관을 따라 올라가 만든 것이라 했다. 그 혹이 몇 억 만개의 세포가 몰려있는 머리 속 혈관을 눌러서 딸꾹질을 일으키고 글씨외 몸의 평형감각을 잃게 하고 말을 어눌하게 한다 했다.
머리의 혹과 왼쪽 신장을 들어내는 두 가지 수수을 해야 했는 데 의사는 머리 수술이 더 급하다 했다. 99년 11월4일, 아빠는 자기 발로 걸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상한 까운을 입고 머리에 퍼런 모자를 쓰고 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는데 나는 끝까지 늠름한 체 하는 그가 안쓰럽기만 했다.
회복하고 한달 반 만에 X-mas 캐롤 속에서 다시 또 대 수술. 나는 신장이란건 우리의 배 밑에, 아주 아래 쪽에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수술한 아빠를 보니 옆구리에서 등을 지나 갈비뼈 올라가는 곳 까지 심한 자국이 있어 깜짝 놀랬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고 사는지. 건강할 때는 얼마나 교만하게 살고 있는건지… 아빠의 다리가 많이 가들어 졌다. 사람이 아파 누워서 걷지 않으면 다리가 가장 먼저 약해진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렇게 그는 회복하며 얼마간을 다시 일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혼자 떠 맡기라도 한 듯이. 자기의 운명도 모른 채. 머리 수술후 3개월만에 다시 MRI를 찍었을 때 머리 맨 밑쪽과 오른쪽 귀 뒤에 두개의 Spot이 생겨 있었다. 온몸의 힘이 갑자기 빠져 나가고 머리 속이 텅 빈 느낌이다. 병원 맨 아래층에 방사선과에 가서 닥터와 앞으로 어떻게 치료 받을 것인가를 상의한다. 한 달치 방사선 치료 스케쥴을 미리 받는다. 본인은 의외로 담담하다. 남의 일인양 나와 닥터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 본다. 36초의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매일을 Bay Bridge를 건너 샌프란시스코를 갔다. 얼마후 예상대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졌다. 미장원에 가서 다 밀어버리고 시원하지?하고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아직 2월말의 바람이 차서 털모자와 가죽 자켓을 사서 입고 저 곳에 와서 찍은 사진∼
유까짱이 멀리서 “엄마!”하고 가자고 부른다. 무어라고 브르면 좋으냐고해서 엄마라고 하라니까 그 발음은 아주 좋은 편이다. 그래. 나는 만인의 엄마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산꼭대기에서 Oneway 로 돌아내려간다. 아주 평화로운 동네다. 하늘과 바다가 똑같은 빛깔로 붙어서 어느 것이 수평선인지 모르겠다. 너무 고유하고 바람내음이 달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다. 쏘살리토 쪽으로 내려가니 알카트라즈 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유까짱이 자기는 저 섬에 너무 가고 싶다고 소릴 지른다.
집에 오니 로렌스가 나의 생일 디너상을 차려 놓았다. 학교의 Food 시간이 재밌어서 크면 셰프가 되겠다는 아이다. 그래 공부만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지. 포테이토 Soup을 끓이고 Pasta를 만들고, 빵으로 모양을 내고 하여튼 오늘의 주제와는 좀 상관없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연습해 놓았다. 사실은 느끼한 것 뿐이었지만 용기를 주기위해 너무 맛있다고 칭찬을 하니까 진짜인줄 알고 Pasta를 자꾸 가져왔다. 쳐다보니 대견하다. 아빠 여동생의 아들이지만 내게는 아들같은 아이다. 착하고 아이가 귀엽다. 아이들에게서 받아보는 생일저녁상. 선물까지 있다. 기분이 좋아서 노래방에 가자고 했더니 아이들의 만세소리.
유까만 빠지고, 아이들 다섯이 모두 차에 탄다. 제일 몸집 큰 승욱이 앞에 타고 뒤에 넷이 끼어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원정을 간다. 가게 아가씨가 방을 정해주고 나가자 마자 승욱이 먼저 마이크를 잡는다. 너무 잘 부른다. 한국말로 음을 달아놓은 일본 노래도 부른다. 목소리가 너무 감미롭다. 고음에서 살짝 넘어가는 것이 전교 노래자랑에서 1등한 실력답다. 다음은 로렌스가 부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정이 비슷하다. 자기 혼자만 도취되어 부르는데 아이들은 언제나 끝나나 하고 쳐다보고 있다. 정말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노래다. 게다가 노래은 왜 또 그리 긴지 3절까지 끝까지 기를 쓰고 부른다. 아이들은 참다못해 우르르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나간다. 갈 필요가 없는 아이들까지 따라 나간다.
평소에도 눈치가 전혀없는 로렌스는 그래도 끝까지 부르고 게다가 다음번 예약버튼까지 눌러놓고 또 준비하고 있다. 다음은 우리 딸 은혜. 가창력은 없지만 그래도 예쁘게 부르려 노력한다. 잘 안 올라가니까 웃는다. 어느새 저렇게 컸을까? 아빠가 저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해서 우리 복뎅이! 우리 복뎅이!하며 쫓아다닐까. 거의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딸 가진 사람 같았다. 딸이 5학년때 한글 백일장에서 은상을 탔는데, 그 딸 자랑하느냐고 자기 아는 사람들한테 모두 전화하고 그것도 모라자 한국에까지 알리느라 상으로 탄 Fund 100불 보다 몇 배나 더 전화요금이 나올 정도였다. 우리 딸이 너무 예쁘니까 크면 자기가 바디 가드해야한다고, 긴 부츠신고 엽총을 들고 따라다니겠다고 큰소리 치더니 저렇게 누워만 있다. 그렇게 유난히 한꺼번에 정을 쏟더니 일찍 떠나려고 그랬던 걸까? 우리는 아빠가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한달 이상 방사선 치료후 아빠의 머리 수술날짜가 다시 정해 졌다. 수술을 위해 MRI와 CT를 촬영하고 금식을 했다. 내일아침 수술날 전날 밤 10시가 넘어 전화벨이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빠 수술 담당의사였다. CT 촬영한 것을 보니 암이 이미 폐에까지 다 전이되었단다. 안됐지만 내일 아침 수술을 취소할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 C.P.M.C. 와 U.C.S.F.를 오가며 온갖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를 받았건만,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그토록 기도하였건만.
이제는 화학요법밖에 없다기에 또 다른 의사에게 갔다. 치료 방법이 바뀔때마다 담당의사도 병원도 바뀐다. 의사는 항암제의 독성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아빠는 이젠 이미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잃은 듯 마치 어린아이같이 내가 가자는대로, 하라는 대로 따라다닐 뿐이다. 그 똑똑하고 건강하던 사람이 이 모든 현실이 자기 일이 아닌양 멍하니 앉아있다. 항암제를 시작하겠다고 싸인을 했다. 약만 먹어도 배 부를 것 같이 많은 양이다. 며칠 후 부터 토하기 시작하며 괴로워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딸을 데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빠는 의식이 없다. 베게 옆으로 토해놓았다. 몸을 흔들고 소리를 친다. 눈꺼풀을 올려보았다. 눈동자가 이상하게 노란 빛을 띄고 있다. 담당의사에게 알렸더니 911이 5분도 못돼 들이 닥쳤다. 결과는 자꾸 토해서 몸에 소금이 모라란 거란다. 그렇게 John Muir 병원에서 한달을 있다가 병원에선 집으로 돌아가길 권했다. 이제 ‘Hospice Care’로 이미 들어간 것이다.
간호원이 병원용 침대와 휠체어 등등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보내고, 가져왔다. 몰핀도 주며 사용방법을 알려준다. 환자가 참기 힘든 고통이 오면 쓰라 하였다. 나이든 간호원은 매일 한번씩 들러서 오늘은 몰핀을 썼나 안썼나 체크한다. 그러나 그이는 임종때까지 단 한 방울의 몰핀도 쓰지 않았다. 그에겐 이상하게도 고통이 없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 약 2,3주간 그는 말이 없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그가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슨 꿈을 꾸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눈이 마주치면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2006년 6월12일은 내 딸의 13번째 생일이었다. 그 날은 월요일이었기에 돌아오는 토요일 17일에 생일파티를 계획하고 친구들과 모두 Water World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13일부터 아빠의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식사도 하지 못했다. 6월14일. 날씨가 너무 더웠다. 100도가 넘는 더위였다. 밤에까지도 열기는 식지않고 후끈거렸다. 저녁에 목사님과 몇몇 분들이 예배드리러 오셨는데 나는 이것이 임종예배가 될는지 알지 못했다. 찬송을 시작하는데 의식도 없는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두고 갈 딸과 아내 때문이었을까? 찬송이 끝나가는데 누군가가 아빠가 숨을 쉬지 않으시는 것 같다했다. 얼른 그의 코 밑에 손등을 갖다댄다. 가슴에 귀를 대본다. 목에서 이상한 어떤 소리가 난다. 순간 아빠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양쪽 입술의 끝이 올라갈 정도로 그기 미소를 띤다. 나는 이제껏 누군가의 죽음을 본적이 없었다. 장례식에는 갔었지만 임종의 순간을 지킨 것은 그가 처음이다. 울고 있던 우리 딸이 아빠가 웃으신다고 중얼거리듯 얘기했다. 나는 모태 신앙이다. 기독교가 처음 원산을 통해 한국에 들어올 때 미국 선교사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이가 나의 할아버님이요. 3대째 장로 집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죽음 후의 세계라는 것은 그때 까지는 그저 막연한 하나의 성경스토리 같은 것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와 가장 가까왔던 남편이 임종의 순간에 그토록 평화롭게 웃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랬고 한편 큰 위로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큰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의 등 밑에 손을 넣어본다. 아직도 따뜻하다. 그가 떠난지 한시간이나 지났는데… 날이 더웠기 때문일까? 간호원이 와서 아빠의 몸에 부착되었던 모든 기구들을 떼어낸다. 몰핀병을 들여다 보더니 부엌 싱크대에 가서 다 쏟아버리고 물을 세게 튼다. 누군가 아빠의 왼손에 끼여있던 결혼반지를 빼고 있다. 결혼후 16년을 한번도 빼어보지 못한 반지라 잘 빠지지 않는다. “그냥 두세요. 끼고 가게요”했지만 유품이라고 결국 빼어내어 내 손에 쥐어준다. 새벽 두시. 까만 장의사 차가 와서 아빠를 싣고 갔다. 아빠보다 훨씬 늙은 장의사가 장례때 갈아 입힐 옷을 달라고 했다. 구두도 달라고 했다.
조문객들도 모두 떠난 밤, 딸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이가 몹시 피곤해 보인다. 재우고 나는 다시 거실로 나온다. 씨트도 다 걷어가 버려서 매트레스 밖에 남지 않은 그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난 걸까? 6월14일 밤 10시10분 그렇게 그는 갔다. 8개월을 아프다가 보람도 없이 떠났다. 나 혼자에게만 많은 짐을 남기고, 어린 딸을 남기고 자기 혼자만 편한 곳으로 갔다.
17일, 딸의 생일파티날, 우리는 대신 추모예배를 드렸다. 파티에 오기로 한 친구들은 장례식장으로 왔다. 그렇게 지난 5년동안 그리움 속에서 허전함 속에서 성장한 나의 딸. 그 가슴 밑바닥의 쓸쓸함을 엄마인들 알 수 있을까? 그러나 나의 걱정을 뒤로 하고, 딸은 열심히 공부하며 자기의 목표를 향해 많은 것을 인내했다. 피는 못 속이는 지, 아빠 집안을 닮아 Artist의 길을 정했다. 그림을 시작한 지 일년 도 못돼 출품할 때 마다 상을 탔다. 인터넷에 그 아이 이름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아빠가 있었으면 또, 딸 아이 자랑으로 전화값이 얼마나 많이 나왔을까를 생각하며 웃었다. 뉴욕과 동부, LA의, 소위 명문미술대학에서 모두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제 딸아이는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달려갈 것이다. 가장 연약하고 솜사탕같이 불안하던 사춘기를 아빠없이도 잘 넘긴 그 아이는 이제 어떤 어려움이 자신의 삶을 막아선다 하여도 좌절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면역이 생겼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들이 내게 마이크를 건넨다. ‘이별’을 부르고 ‘초우’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자 마자 우우 패티 황! 패티 황하는 아이들의 환호성에는 일말의 야유가 섞여 있지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며 허리를 90도로 꺾고 일부러 정중히, 천천히 인사한다. 거기까지는 잘 진행됐는데, 웬지 찬송가도 한장 불러야 아이들에게 위엄이 설 것 같아서 때 아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다가 사오정 같다고 결국 아이들에게 마이크를 뺐겼다. 윤짱이 요즘 일본서 유행한다는 노래를 공주님처럼 예쁘게 부른다. 원경이도 미국노래를 부른다. 동요를 부르는 것 같다. 로렌스가 또 노래를 시작하려는 바람에 우리 모두는 시간이 오래되서 돈이 많이 나올꺼라는 핑계로 약속이나 한 듯 일어나 뛰쳐 나온다. 모두 다 쿡쿡 웃고 있는데, 눈치 없는 로렌스만 맘것 부르지 못한 노래 때문에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다시 아이들을 차석에 구겨넣고 베이브리지를 건너 돌아온다. 밤 바람이 차다. 까만 바다에 반짝이는 불빛들이 아련하다. 이제 여름이 오면 원경이와 Grace는 대학으로 떠날 것이다. 아이들도, 나도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힘들기도 했다. 너무 바빴다. 어쩌면 바쁜 것이 내 삶을 지탱해 준 것 같아 감사하기도하다. 지혜롭게 잘 자라준 딸이 고맙고, 동생을 잘 돌보아준 원경이가 고맙기만 하다.
돌아보면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그러나 이제 그 터널의 끝이 보인다. 밝다. 환한 빛이 어둠, 그 끝에서 시작되고 있다. 마지막 터널 어둠 속을 빨리 빠져 나오려는 듯이 차의 속력을 더해 달린다. 잡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우르르 차에서 쏟아져 나온다. 각기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합창을 한다. “사감님! Happy Birthday!! 축하해요! 정말이예요!
12시가 넘었다. 내일은 또 아이들과 무얼 해 먹지?…
<당선 소감>
기쁘다.
더위에 시달리다가 한 줄기 소나기를 맞은 기분이다. 기쁨도 슬픔도 어려움도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온다. 다만 어떤 View에서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는 가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나의 수기는, 운명을 개척한다는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그저 내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고 담담히 기다렸을 뿐이다.
나는 깨닫는다. 힘들수록, 삶의 순수함과 유머를 잃으면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을. 고단한 삶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들. 우리 모두 말하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고.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다만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